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일방 처리한 양곡관리법 등 법안 6개에 대해 재의를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이 법안들은 대부분 시장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을 담고 있고, 국가 재정에 매년 조 단위의 부담을 더하기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다만 민주당이 보복성 탄핵소추를 추진할 경우 한 대행 체제가 무너질 수 있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한 대행은 17일 열리는 정기 국무회의에는 거부권 행사안을 상정하지 않고, 좀 더 논의를 거쳐 이번 주 중으로 임시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총리실은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이 일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던 선례를 염두에 두고, 특정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국민과 야당에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6개 법안 가운데 이른바 ‘농업 4법’은 특정 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에게 제도적으로 특혜를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값이 평년 가격보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우, 농협이 시장 수요보다 많이 공급되는 쌀을 의무적으로 사들이도록 했다. 농협이 쓴 돈은 정부가 메워준다. 사실상 세금으로 쌀값을 떠받치는 법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쌀이 이미 과잉생산되는 상황에서 이 법안이 시행되면 국내 농업 경쟁력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기획재정부는 남는 쌀 매입에만 2030년까지 연평균 1조원을 쓰게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때문에 민주당 정권 시절에도 양곡관리법 개정에 반대했었다.
농수산물가격안정법 개정안은 쌀 외에 다른 농산물도 ‘기준 가격’을 정하도록 하고, 농산물 가격이 기준 가격 아래로 떨어지면 정부가 해당 작물 생산자에게 그 차액을 보상해 주도록 했다. 정부는 특정 농작물의 가격을 보장해 주면, 너도나도 해당 작물만 재배하게 돼 공급과잉이 심해지고, 재정지출도 늘어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라며 반대한다.
농어업재해대책법 개정안은 농민이 각종 재해를 당해 농사를 망치면 해당 작물을 기르는 데 들어간 비용 전부를 정부가 보상해 주는 내용이다. 정부는 이 법안으로 생기는 재정 부담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다른 산업과 형평성도 맞지 않는다며 반대한다. 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은 농어업 재해보험에 가입한 농민이 자연재해로 피해를 보면 보험사가 손해를 보상해주도록 하고 보험료를 할증해 받는 것도 금지한다. 정부는 이 법안이 시행될 경우 보험 시장의 기본 원칙이 무너지고, 관련 보험 상품이 아예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민주당이 농업 4법과 함께 통과시킨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은 국회가 누군가에게 서류 제출이나 증인·참고인 출석을 요구하면 이를 거부할 수 없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지금은 국회가 국정감사·국정조사를 하는 경우에 한해 증인을 부를 수 있지만, 개정안이 시행되면 안건 심사와 청문회 등에도 증인·참고인을 부를 수 있다. 재계에선 이 법안이 시행되면 기업 관계자들이 수시로 국회에 불려나가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또 국회가 개인 정보나 영업 비밀을 제출하라고 요구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없어 기업 비밀이 국회를 통해 경쟁국 등으로 새어나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국회법 개정안은 ‘예산안 부수 법안 자동 부의(附議)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한 대행은 국가 미래에 해가 되는 법안이라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고, 대통령 권한대행도 헌법상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건 전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2004년에 법안 2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선례도 있다.
민주당도 한 대행이 법안 6개를 거부하려는 데 대해 여러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들이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하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에는 민주당에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농업 4법은 재정 부담이 크고, 국회증언감정법은 국회에 민주당 정부 관계자들이 수시로 불려 나오게 하고, 국회법은 민주당 정부의 예산·세법 협상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