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찰청이 통일혁명당(북한 연계 지하당 조직) 사건에 연루돼 20년을 복역한 고(故)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서체(어깨동무체)로 쓴 표어를 사용 중인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앞서 국가정보원도 지난달 4일 ‘신영복체'로 쓴 새 원훈석(院訓石)을 공개해 논란이 됐다. 과거 대공 수사를 주도한 기관(국정원)과 대공 수사권을 이관받게 된 기관(경찰)이 대표적 공안사범의 서체를 원훈·표어에 사용하는 것을 두고 적절성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경찰청의 신영복체 사용에 관심이 집중된 계기는 지난 9일 열린 최관호 신임 서울경찰청장의 취임식이다. 당시 최 청장은 ‘가장 안전한 수도치안, 존경과 사랑받는 서울경찰’이란 글귀가 적힌 푸른색 벽을 등지고 취임사를 했다. 서울경찰청 측은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취임식 소식을 사진과 함께 내부망에 올렸는데, 이를 본 상당수 경찰 간부들이 문제의 글귀가 신영복체임을 지적한 것이다. 대공 수사를 담당하는 안보경찰들 사이에선 “간첩을 잡아야 할 경찰 책임자가 국보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인사의 글씨체를 적어놓고 취임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하는 기류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글귀는 서울경찰청의 ‘비전 표어’로, 최 청장의 전임인 장하연 전 청장 시절 만든 것이다. 장 전 청장 역시 작년 8월 취임식 때 이 표어가 적힌 현수막을 등지고 취임사를 했다. 당시 서울청은 신영복체로 쓴 현수막 디자인을 일선 경찰서들에도 배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서울경찰청 표어에 갑자기 관심이 집중된 것은 최근 불거진 국정원 원훈석 논란 때문인 듯하다”고 했다.
작년 서울경찰청으로부터 표어 디자인을 의뢰받은 업체는 서울청이 직접 신영복체를 골랐다는 입장이다. 업체 관계자는 본지 전화 통화에서 “당시 신영복체, 포천막걸리체 등 3가지 글씨체를 시안으로 만들어 서울청에 전달했다”며 “이 중 서울청에서 고른 게 신영복체”라고 했다. 서울청 관계자는 “현수막 시안을 받았을 때 따로 글씨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며 “실무자가 (신영복체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눈에 잘 띄는 글씨체를 골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안팎에선 “장하연 전 청장이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나온다. 경찰대 5기인 장 전 청장은 현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파견돼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인 윤건영 당시 국정상황실장(현 국회의원)과 호흡을 맞췄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장하성 주중 대사의 친척이기도 하다. 신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아왔고,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 등이 제자로 알려져 있다.
신영복 전 교수는 1988년 사상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 뒤에도 “난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에 이어 경찰까지 신영복체를 사용한 것을 두고 ‘정체성 부정’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안보경찰은 “정권 코드 맞추겠다고 이런 것을 지시하는 고위 간부들과 같은 경찰이라는 게 수치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