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후보는 노동운동가로서나 행정가로서나 ‘현장’에서 뜨거웠던 활동가로 평가된다. 서울대 재학 시절 사회운동 이력으로 두 번의 제적을 당하고, 수차례 고문을 받았다. 아내 설난영씨는 노동운동 중에 만났다. 동구권 몰락을 계기로 보수 정치로 전향한 이후로는 ‘여의도 천막 당사’로 당을 일신시켰다. 이후 경기도지사를 두 번 역임하던 그는, 2016년 총선 패배로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2·3 비상계엄 국면에서 ‘꼿꼿문수’로 재등장했다.
◇대학 제적·수감 두 번씩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서울 청계천 피복 공장 등을 7년 이상 다니며 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1970년대 서울대에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제적됐고, 1980년대엔 노동운동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옥고도 치렀다. 민주화 운동 혐의로 투옥됐을 때 고문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김 후보 부친이 빚보증을 섰다가 잘못돼 10세 때부터 판잣집 단칸방에 살았다고 한다. 밥상 하나에 7남매가 호롱불을 켜고 둘러앉아 공부했다는 김 후보는 대구의 경북중·고를 나왔다. 고교 3학년 땐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고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 재학 중 학생 운동 서클인 ‘후진국 사회 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유신(維新) 독재 타도 운동을 했다. 김 후보는 학회 활동을 하며 목격한 철거민촌 빈민들 모습에 충격받고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전국민주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1971년과 1974년 대학에서 두 번 제적당했다.
김 후보는 학교를 떠나 7년 동안 현장 노동자로 일했다. 1975년 청계천 피복 공장에 재단 보조로 취직했다. 처음엔 ‘또또사’ 일을 했다. 옷에 똑딱이 단추 구멍을 뚫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일이 미숙해) 재단사에게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며 “처음으로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그 시절 열관리기능사 등 자격증을 7가지 땄다. 이 자격증을 갖고 한일공업(도루코)에 보일러공으로 취업했다. 그는 여기서 노조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인 노동 운동에 나섰다.
김 후보는 1980년 2월 반국가 모임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수감됐다. 1985년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1986년엔 5·3 인천 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김 후보는 회고록에서 1986년 수감 당시 ‘족수승(손발을 몸 뒤쪽으로 활처럼 묶는 것)’ 등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인간이 이런 비인간적 가혹 행위를 하고, 또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며 “머리를 마룻바닥에 찧어 죽어버리려고 하니 검도 투구보다 더 둔탁한 투구를 (머리에) 덮어 씌웠다”고 했다.
김 후보는 1980년대 ‘운동권의 신화’로 통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과거 한 TV 프로그램에서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했다. 김 후보와 노동운동을 함께한 한 인사는 “그 시절 김문수는 뜨겁게 운동한 혁명가였다”고 했다.
김 후보가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을 때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여동생 유시주씨가 같이 연행됐고, 유 전 이사장 누나인 유시춘 EBS 이사장이 ‘구속자 가족 협의회’ 총무를 맡아 김 후보 옥바라지와 석방 운동을 주도한 일도 있다. 김 후보는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은 유 전 이사장과 TV 토론회에서 “유 전 이사장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온 가족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1990년 민중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 진입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 무렵 소련 등 공산주의 동구권 붕괴를 보고 노선을 보수로 전향했다. 그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김 후보는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하던 아내 설난영(72)씨를 만났다. 5공 신군부가 김 후보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려고 수배령을 내렸을 때 설씨 자취방에 숨어 있으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둘은 1981년 서울 봉천동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 후보는 “우리는 청첩장도 없고, 드레스도 없었다”고 했다. 당시 교회 주변엔 전투경찰 버스 4대가 대기했다고 한다. 결혼을 가장한 노동자 시위라고 의심한 것이다. 김 후보는 최근 경선 토론회에서 ‘별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어려움 속에서 제 아내를 만난 것. 그보다 더 큰 별의 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문수의 보수정치 시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1990년대 동구권 붕괴를 계기로 노동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노동운동을 제도권 내로 이어가자”며 이재오 전 의원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하나의 의석도 얻지 못하고 해산했다. 이후 택시 운전수 일을 하던 김 후보는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국민의힘 전신(前身)인 민주자유당에 전격 입당했다. 김 후보는 보수 정당 입당 배경에 대해 “밖에서 혁명을 계속 꿈꾼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영입한 인재였지만 곧바로 ‘꽃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 후보는 당시 야당(새정치국민회의) 텃밭인 경기 부천 소사에 출마했다. 상대는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이었다. 당시 김 후보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는 자서전을 펴내자, 박 의원은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라는 저격용 책을 냈다. 이 일로 고소전까지 벌어지면서 부천 소사의 ‘넥타이 전쟁’은 전국적 화제를 불러모았다. 김 후보는 1.94%포인트 격차의 신승을 거뒀고, 이후 부천 소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김 후보의 또 다른 정치 변곡점은 소속당(한나라당)이 ‘차떼기당’ 꼬리표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逆風)으로 위기에 몰렸던 2004년 17대 총선 때다. 김 후보는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죽을 각오로 한나라당을 대청소하겠다”고 했다. 실제 김 후보는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등 중진 37명을 불출마시켰고, 강남 출마가 거론됐던 홍사덕 원내 총무는 경기 고양 일산갑으로 보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쳤다. 궤멸 위기를 딛고 121석을 얻은 당시 ‘김문수 공천’은 지금도 공천 개혁의 성공 사례로 거론된다.
김 후보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데 이어 2010년 재선에 성공했다. 경기도지사 재직 시절 추진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기획, 수도권 통합 요금제, 광교·판교·다산신도시 개발, 삼성반도체 평택캠퍼스 유치는 김 후보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반면 2011년 소방서에 전화해서 소방관에게 거듭 ‘관등성명’을 요구했던 녹음 파일이 공개된 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김 후보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론을 형성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밀렸다.
김 후보가 ‘선출직 휴지기(休止期)’에 들어간 것은 2016년 20대 총선부터였다. 당에서는 “험지(險地)에 출마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김 후보는 대구 수성갑 출마를 강행했다. 대구 수성갑에서 김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맞붙어 24.6%포인트 격차로 크게 졌다. 이 일을 계기로 당내 김 후보의 정치적 위상은 하락했다. 이후 김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 속에서 치러진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박원순 전 시장에게 패배했다. 이듬해인 2019년 김 후보는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기독자유통일당을 창당하면서 ‘아스팔트 보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김 후보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대통령 소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발탁됐다.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출석한 국정감사에서 김 후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일성주의자”라고 발언하면서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보수 진영 내에서 김 후보의 선명성이 부각됐고, 지난해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됐다.
정치권에선 “김문수가 12·3 비상계엄 국면에서 정치 무대에 다시 올랐다”는 평가가 많다. 비상계엄 선포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는 계엄 해제 후 국회 긴급 현안 질문 때 민주당 서영교 의원의 ‘국무위원 단체 사과’ 요구를 홀로 거부했다. 당시 김 후보만이 자리에 앉아 있던 장면이 회자되면서 지지층 사이에선 ‘꼿꼿문수’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전까지 대선 주자 후보군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김 후보는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범보수 주자 최상위권에 줄곧 이름을 올렸고, 결국 국민의힘 대선 후보직을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