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스텔스 폭격기 B-2 모형을 가운데 두고 두 손을 펼쳐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미국의 안보 지원’을 언급하며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압박 수위를 높였다./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 시각) 주한미군을 거론하며 한국이 일본·독일 등과 함께 이란이 사실상 봉쇄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호위 작전에서 “우리(미국)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원유 수급을 상당 부분 중동에 의존하는 한·일이 군함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미국의 ‘안보 우산’ 제공을 빌미 삼아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 일본, 독일에 각각 “4만5000명의 병력을 두고 있다”며 “우리는 이 모든 나라를 방어하고 있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실제 규모는 주일미군(5만명)이나 주독미군(3만5000명)보다 적은 2만8500명 정도다. 이어 트럼프는 “그런데 우리가 ‘기뢰 제거함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글쎄,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며 “40년 동안 우리가 여러분을 보호했다”고 했다. 미군이 주둔 중인 한국 등을 콕 집어 미국의 안보 지원을 받으면서도 대(對)이란 작전과 관련된 군사 협력에는 주저한다는 식으로 압박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난처한 기색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17일 국회 외통위 회의에서 군함 파견 요청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요청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은 전날 조 장관과 통화하며 ‘호르무즈 해협 안전 확보를 위한 협력’을 강조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 회의에서 파병 요청이 “없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전력을 보내 달라는 문서 등을 접수한 적 없다는 것이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소말리아 아덴만에 파병된 청해부대의 임무 변경 등 여러 방안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야 의원들은 이날 “참전이 되면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 “잘못 파병하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 “40년 보호해줬다” 고강도 압박… 고심 깊어지는 청와대

지난 14일(현지 시각) 한·중·일·영·프 등 5국을 지목해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 파견을 요구했던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후 연일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는 16일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케네디 센터’ 이사회 오찬에서 “우리는 원유 수입의 1% 미만을 이 해협을 통해 들여오지만, 어떤 국가들은 훨씬 더 많은 양을 조달한다”며 한·중·일을 언급했다. 한국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호르무즈 해협 통과 원유 수입에 대한 의존도는 한국 62%, 일본 69%, 중국 49% 수준이다.

트럼프는 또 국가를 특정하지 않으면서도 “40년 동안 우리가 여러분을 보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소하고 총격전도 몇 번 안 날, 게다가 탄약도 얼마 남지 않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라고 했다. 이란의 전력이 상당 부분 소진된 만큼, 호위 선단에 참여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호르무즈 통과 원유 의존도와 미국의 안보 우산 제공 여부를 호위 선단 참여의 기준으로 삼을 경우, 한국과 일본이 가장 큰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구체적인 공식 요청을 해오면 신중하게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대응을 고심 중이다. 내부적으로는 미국의 요구가 점차 거세질 것에 대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당국자는 “여러 검토를 하고 있다”며 “19일 미·일 정상회담을 앞둔 일본 사례도 참고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자위대 파견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이치 총리는 오는 19일 워싱턴DC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할 예정으로, 정상 간에 군함 파견을 논의하면 가닥이 빨리 잡힐 수 있다. 만약 일본이 지원을 결정하면, 트럼프가 주한미군 감축·철수 등을 거론하며 한국에 더 큰 압박을 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상호 관세’는 무효라고 판결한 후,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법 301조를 이용해 다시 고율 관세를 부과하려 하고 있는 상황도 하나의 변수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소말리아 아덴만에 파병된 청해부대 ‘대조영함’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해적 소탕을 위해 출항한 대조영함에는 기뢰 제거용 ‘소해(掃海) 헬기’나 복수의 지대함 미사일 동시 교전이 가능한 이지스 장비 등 이란의 공격에 대비한 무장이 갖춰져 있지 않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17일 국회 국방위 회의에서 현재의 무장 상태 그대로는 대조영함을 보내는 것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대조영함보다 무장 수준이 높은 이지스구축함을 파견하는 방안에 대해 해군 관계자는 “장비 준비에만 1달 이상 필요하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뢰 제거용 ‘소해함’을 원하고 있지만, 우리 해군의 소해함 10여 척은 모두 700t급 이하 소규모 함정으로 원양 작전이 어렵다. 이지스구축함이나 소해함을 파견한다면 준비와 이동에만 두 달 가까이 소요될 전망이다.

국회 비준 동의를 얻는 것도 문제다. 안 장관은 “(호르무즈 군함 파견은) 국회 동의 사안”이라고 했다. 이번 파병에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는 데는 여야가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호르무즈 해협의 폭이 39㎞인데 항로는 5㎞ 내외로 훨씬 좁다. 우리 군이 그런 곳에 간다면 집중적으로 전투가 벌어질 수 있고, 상당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며 “신중을 기해달라”고 했다.

여권에서는 노골적 ‘반대’ 의견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김상욱 의원은 “이번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침략 전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 파병하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다. 우리 헌법은 침략 전쟁을 부인한다.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도 “이 전쟁은 불법”이라며 “그래서 파병이 불법이 되는 것이고 위헌”이라고 했다.

청와대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조현 장관은 오는 25~27일 프랑스에서 열리는 주요 7국(G7) 외교장관 확대회의에 참여해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면담할 예정이다. 결국 19일 미일 정상회담, 25~27일 G7 외교장관 회의 등에서 드러나는 우방국들의 동향을 살펴본 후, 우리 정책을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