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5개 국가에 긴장이 고조되는 호르무즈 해협에 미국을 도울 군함 파견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바라건대, 지도부가 완전히 제거된 국가에 의해 호르무즈 해협이 더 이상 위협 받지 않도록 (이란 정부의) 인위적 제약의 영향을 받는 중국, 프랑스, 일본, 한국, 영국, 그리고 다른 국가들도 이곳으로 함정을 보낼 것”이라는 글을 게시했다.
미국은 지난달 전쟁 시작 후, 주로 이란에서 수백~1000㎞ 이상 떨어진 곳에서 원거리 공격을 해왔는데, 조만간 호르무즈 해협 선박 호위 작전을 개시할 때 지원해달라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폭이 약 40㎞에 불과해 이란의 기뢰, 드론에 노출되기 쉬운데 호르무즈 해협을 주로 이용하는 국가를 묶어 다국적군을 편성해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의 지명을 받은 국가들은 모두 신중한 입장을 밝힐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느닷없이 국제법적으로 정당성이 부족하고 명분이 없는 전쟁을 벌여 여론이 좋지 않기에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는 분위기다.
트럼프가 고른 5개국 중 미국의 동맹이 아닌 국가는 중국이 유일하다. 중국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중국은 소비 원유의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며, 이 중 45% 정도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호르무즈 통과 물동량의 37.7%가 중국으로 향한다.
◇트럼프의 동참 요구에… 中 거부, 英·佛 신중, 日은 수용할 수도
하지만, 미국과 전략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미국 주도의 군사 행동에 힘을 보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주미 중국 대사관 대변인은 15일 호르무즈 해협에 해군 전력을 배치할 계획이 있는지를 묻는 CNN 방송 질의에 “중국은 즉각적인 적대 행위 중단을 촉구한다”며 “모든 당사국은 안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에너지 공급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어 “중국은 중동 국가들의 진정한 친구이자 전략적 파트너로서, 분쟁 당사국을 포함한 관련국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긴장 완화·평화 회복을 위한 건설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긴장 완화를 위한 건설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트럼프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달 말 트럼프의 방중이 예정돼 있는 상태에서 정상 외교 부담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요청을 노골적인 언사로 거부하지는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도 우방인 중국으로 향하는 선박의 통행은 허용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카이치 일 총리의 선택 주목
일본은 이란과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자위대의 해외 활동에 대한 법적 제약이 많아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19일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개헌을 비롯한 여러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 트럼프의 군함 파견 요구에 응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특히 일본 해상 자위대는 신형 소해함 25척 이상, 소해 헬기 19대 등을 보유해 압도적인 기뢰 제거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이란이 해협 인근에 기뢰를 깔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에 기대하는 역할이 커지면 일본도 군함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일본은 아베 내각 시절인 2019년 미국·이란 긴장 고조로 트럼프 정부로부터 호르무즈 해협 연합 작전을 요구받자 절충안을 택했다. 군사 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정보 수집 명분으로 호위함 1척을 보냈지만, 지금은 트럼프의 요구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자위대 구축함 등을 보낼 경우 법적 근거를 고민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가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동맹국에 군함 파견을 요청하자 영국 정부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국 국방부는 현재 미국 및 동맹국들과 해상 안보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즉각적인 군함 파견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이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만큼 상선 보호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군사적 긴장 고조에 따른 위험을 면밀히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역시 트럼프의 요구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으로 미국 주도의 군사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은 선호하지 않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프랑스와 일부 국가가 상선 호위를 위한 ‘순수 방어적 성격의 호위 임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계획은 유럽 주도의 해상 작전 틀 안에서 상선의 안전 항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과 프랑스는 단독 행동보다는 유럽 동맹국들과의 다자적 해상 보호 체계를 통한 대응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처음으로 파병 요구
트럼프는 그동안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을 압박해왔는데, 한국에 파병을 요구한 것은 처음이다. 청와대는 15일 트럼프의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 요구에 대해 “한미 간에 긴밀하게 소통하고 신중히 검토해 판단해 나가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는 “국제 해상 교통로의 안전과 항행의 자유는 모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며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라며 “이에 기반해 글로벌 해상 물류망이 조속히 정상화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지난달 이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후, 우리나라에 미국의 지원 요청이 올 것으로 보고 내부적으로는 이에 대한 대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주로 1990년대 이후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한미 간의 협상, 지원 결과 및 효과 등을 검토해 왔다. 하지만, 당시의 파병이 주로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토대로 이뤄진 것과는 달리 파병 명분이 없다는 것 때문에 고심하는 분위기다.
‘트럼프의 전쟁’에 대해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은 데다 특히 여권 내부에선 이번 전쟁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트럼프가 군함 파견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진 뒤, 15일 아침 일찍부터 여당의 외교안보 자문단 단체 대화방에 여러 글이 올라오는데 트럼프를 비판하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등은 벌써부터 장문의 파병 반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이 다국적군 일원으로 호르무즈 해협에 투입되려면 별도의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한데, 여당이 이에 동의할지가 불투명하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전과는 달리 이란 수도 테헤란에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다. 교민들은 대부분 대피했지만, 김준표 대사 등 우리 외교관들은 사무실과 지하 안전 시설을 오가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주이란 대사관 주변에 매일 포탄 소리가 들리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대사관을 철수시킬 계획은 없다”고 했다. 한국과 이란의 교역 규모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 이후 급격히 축소된 상태지만, 에너지 부국(富國)인 이란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위기 상황에서 대사관을 철수시키면 이란은 물론 중동 지역의 다른 국가에도 좋지 못한 신호를 줄 수 있다. 과거 이란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부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미국을 도와서 군사작전에 깊숙이 관여하면,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이란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트럼프로부터 군함 지원 요구는 받았지만, 제한적으로 응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도 한국은 전투 임무 대신 재건과 안정화 지원 중심의 작전을 맡았다. 한미 동맹을 고려하면서도 중동 지역 외교 관계를 함께 감안한 절충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에 대해 만족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특성상 한국의 지원 움직임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전혀 관계없는 품목별 관세 등으로 보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전쟁이 장기화하면 미국이 우리에게 무기 및 군수품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도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