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 중인 조현 외교부 장관은 5일(현지 시각) 워싱턴DC에서 열린 한국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이틀 전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 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나눈 대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한미 외교장관 회담 전 루비오 장관이 “(한국 정부의) 통상 공약 이행과 관련해 우리 측 내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상황을 솔직히 공유하겠다”는 얘기부터 했다는 것이다.
루비오 장관은 “통상이든 안보든 합의 이행 지연이 생기는 것은 미국 정부도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통상 합의 이행의 지연으로 인한 부정적 기류가 한미 관계 전반에 확산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해 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 시각) 대미 투자 지연을 문제 삼아 한국에 대한 관세를 15%에서 25%로 다시 올리겠다고 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대응을 서둘러 달라는 당부로 볼 수 있다.
비공개 외교 회담에서 카운터파트가 갈등이 있는 현안에 대해 한 발언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데 조 장관이 이런 발언을 소개하기에 앞서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도 5일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관세 협상이 사달이 나서 안보 합의도 흔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재명 정부의 ‘외교 라인 투톱’인 위 실장과 조 장관이 거의 동시에 한미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경고’를 한 것이다.
그 배경에 대해 우선 ‘비공개 회담에서 전달되는 미국 내 분위기가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당초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재인상 압박은 대미투자특별법 지연 때문이며, 국내 입법 절차를 잘 설명하면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봤다. 지난달 28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미국의 불만은 100% 입법 지연에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같은 날 조 장관도 “쿠팡이나 온플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에 급파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달 29~30일(현지 시각) 이틀에 걸쳐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에게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미국 정부는 관세를 25%로 올리기 위한 관보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리 국회의 입법 시까지 관보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답도 주지 않았고, 법 통과 후에 다시 관세를 15%로 인하한다는 보장도 없다. 한번 관보가 게재되고 나면 다시 되돌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위 실장과 조 장관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두 번째 배경으로는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안보 합의 이행을 위한 실무 협의 지연이 거론된다. 당초 미국은 한국의 우라늄 농축,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와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을 위한 협상단을 올해 초 한국에 보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올 들어 분위기가 바뀌더니 방한 일정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실장은 5일 한 인터뷰에서 “쿠팡, 디지털 무역 장벽, 온라인플랫폼법, 손현보 목사 등 미국 정부가 동시에 다루는 현안이 있다. 여러 소재가 핵잠, 농축·재처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지난 4일(현지 시각) 만났던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한국이 (대미) 전략 투자뿐 아니라 ‘비관세 장벽’과 관련한 사안에서도 진전된 입장을 조속히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투자 입법만이 문제가 아니며, 양국 간 ‘조인트 팩트시트’의 충실한 이행을 통해 한미 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취지다. 정부 소식통은 “한국의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와 원잠 도입은 수십 년에 걸친 숙원 사업으로 어렵게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라며 “그러잖아도 미국 내 반대 세력이 많은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경제·통상 라인이나 여권 일각에는 환율 문제와 투자 결과의 불확실성 등을 고려할 때 대미 투자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여전히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위 실장과 조 장관이 국내 정치권에는 ‘한미 관계를 생각해 달라’, 미국에는 ‘합의 파기를 미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공개적으로 위기설을 제기했다”는 말도 나온다. 아울러 여야가 기왕에 대미투자특별법 처리를 위한 국회 특위 구성에 합의한 만큼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