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사령부가 군사분계선(MDL) 남측 비무장지대(DMZ) 구역에 대한 출입 통제는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의 고유 권한이라고 강조하는 공개 성명을 17일 냈다. 유엔사는 DMZ 관리 역할이 “남북 긴장 고조 시 안정 유지에 필수적”이라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비군사적 목적의 DMZ 출입은 우리 정부가 승인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발의하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평시 한반도 정전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유엔사가 특정 현안과 관련해 공개 입장을 낸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DMZ 출입 통제권의 근거를 성명으로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판문점 유엔사령부 건물.

유엔사는 이날 홈페이지에 게재한 ‘군사정전위원회의 권한과 절차에 대한 성명’에서 6·25 정전협정 1조 10항을 인용해 “군사분계선 남측 DMZ 내 민사 행정 및 구호는 유엔군사령관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또 정전협정 제1조 9항을 인용해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 집행과 관련된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 허가를 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DMZ에 출입할 수 없다”고 했다. ‘비군사적 목적’의 출입이라도 유엔사에 통제 권한이 있다는 취지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측 DMZ 출입은 유엔사가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이재강·한정애 의원 등은 비군사적·평화적 목적의 경우 DMZ 출입을 한국 정부가 승인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이와 관련, 지난 3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유엔사가 김현종 국가안보실 1차장의 DMZ 출입을 불허했던 사실이 있다고 공개하며 “우리의 영토 주권을 마땅히 행사해야 할 그 지역의 출입조차 통제당하는 이 현실을 보면 주권 국가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엔사 관계자는 본지에 “DMZ 출입 통제는 주권이 아닌 관할권(jurisdiction)의 문제이고, 정전협정에 따라 그 관할권은 유엔사령관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유엔사는 이날 김 차장이 조지프 힐버트 미8군사령관과 함께 DMZ 내부를 시찰할 수 있도록 ‘DMZ 출입을 승인(grant)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국제 조약 따라 유엔사가 DMZ 관리, 국내법으로 우회 힘들어”

유엔군사령부는 17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성명에서 “유엔사는 유엔사 군사정전위를 통해 현재 유엔사 18개 회원국과 한국을 대표해 정전협정 조건을 이행한다”고 밝혔다. 1953년 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한국 및 22개 파견국(현재는 18개 회원국)을 대표해 정전협정에 서명한 만큼, 한국도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여당에서는 DMZ도 “대한민국 영토”인 만큼, 출입 관리 권한 일부를 우리 정부가 갖는 것은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보고 있다. 민주당이 이런 논리로 DMZ 출입 승인 권한을 통일부 장관에게 주는 법안을 발의하자, 조원철 법제처장도 최근 유엔사 핵심 관계자를 불러 이 문제를 논의했다. 통일부는 이날 유엔사의 성명 발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DMZ의 평화적 이용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관계부처 협조 하에서 유엔사와의 협의를 추진하고 국회 입법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양측의 종전 협정 등으로 대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갖는 국제 조약이기 때문에, 국내법을 통해 이를 우회하는 것은 어렵다는 해석이 많다. 한국도 비준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27조는 “당사자는 자신의 조약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근거로서 자신의 국내법 규정을 원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성호 중앙대 명예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정전협정이란 조약에 따라 유엔사가 DMZ 출입 통제를 하게 돼 있는데, 이를 불이행하기 위해 국내법을 제정하면 비엔나 협약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했다.

유엔사의 DMZ 출입 통제권을 회수하는 것이 ‘주권 행사’란 논리 자체가 문제란 지적도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유엔사라는 외국 세력이 한반도에서 우리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시각은 과거 북한이 주장했던 ‘우리 민족끼리’와 같은 논리 구조에서 나오는 주장”이라고 했다.

유엔사는 이날 성명에서 “7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엔사는 정전협정을 보존하는 임무를 확고히 수행해 왔다”며 “치안 유지와 인프라 지원, 의료 후송, 안전 점검 등 특정 핵심 임무는 주로 한국군이 수행함으로써 주권과 자국 방어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했다. 유엔사는 DMZ 출입을 관리하며 평화 유지를 돕고 있을 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다.

전직 고위 당국자는 “DMZ 관리 권한 문제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입법을 통해 진행할 것이 아니라 한미 군사 당국 간에 조용히 협의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유엔사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지냈던 예비역 장성은 “유엔사가 공개적으로 성명을 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한국 정부와 유엔사가 물밑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