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연합뉴스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지원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에서 남북 관계를 먼저 개선, 미북 대화로 이어지게 하는 ‘피스메이커’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16일 외교부 청사에서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수석 대표로 참석한 가운데 대북 정책 조율을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통일부는 불참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외교부 주도의 한미 협의가 결국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며 반대 입장을 밝힌 데 이어 통일부 관계자들을 회의에 보내지 않은 것이다.

이에 앞서 15일 임동원·정세현·이재정·조명균·김연철·이인영 등 진보 정부 출신 전직 통일부 장관 6명은 ‘제2의 한미 워킹그룹에 반대한다’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냈다. 임 전 장관 등은 “과거 (문재인 정부 때) 한미 워킹그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 협의가 아니라 남북 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만 높이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전문성이 없고 남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 정책을 맡길 수 없다”고도 했다.

통일부가 한미 간 대북 정책 협의체에 공개적으로 불참 의사를 밝히고, 전직 장관들까지 이에 맞춰 성명을 낸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민주당 이재강, 조국혁신당 서왕진 원내대표, 진보당 윤종오, 사회민주당 한창민 의원 등 10명의 의원도 ‘한미 워킹그룹’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며 좌파 단체가 외교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는 외교부와 통일부 간의 대북 정책 주도권 다툼을 넘어, 이재명 정부 안팎의 기류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맹파’와 ‘자주파’ 간의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이 속도를 정해주는 페이스메이커에 머무르기보다 한국 정부가 직접 ‘레이스’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북한 문제와 관련해 미국을 돕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며 북한 문제에 대한 ‘운전대’를 넘겼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16일 미국 방문에 앞서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피스메이커·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논의하셨기에 앞으로 그런 역할 조정을 어떻게 추진하고 어떤 방향으로 공조할지 세부 협의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연두 외교전략정보본부장(오른쪽)이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를 16일 한미 대북 정책 조율을 위한 회의장으로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북 정상회담 불발이 분기점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기대했던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자주파를 중심으로 정책 변경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나섰던 선수가 우승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며 “정부도 필요하다면 먼저 치고 나가는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재명 정부 안팎의 기류 변화 분기점은 지난 10월 경주 APEC을 계기로 추진됐던 트럼프-김정은 회동 불발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국무부는 회동 성사 가능성을 높게 보고 아시아 순방에 나설 때 판문점에서의 미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뒀다. 주한미대사관도 미북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에 대비, 지원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 의사를 밝혔음에도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후 미국에서 대북 제재 강화 카드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 내 자주파 진영에서는 미국 주도의 북한과의 대화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이 같은 흐름의 선두에 섰다. 정 장관은 지난달 “미국의 승인과 결재를 기다리는 관료적 사고로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한미 연합훈련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는 지난 8월 이 대통령이 ‘페이스메이커’를 언급할 때부터 불만이 있었다. “왜 남북 간의 문제를 외세(外勢)에 맡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9월 미국과의 협의를 중시하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등 동맹파를 겨냥, “대통령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드는 세력”이라며 인적 쇄신 필요성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2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을 발가벗기듯’ 비핵화를 요구했다며 “김 위원장이 트럼프와의 회담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커져왔다.

여권 내부에서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대북 정책 조정 필요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활동했던 외교안보 전문가는 “대통령실은 이재명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의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 대통령이 페이스메이커에 머무르기보다 직접 나서는 모습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이재명 정부가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 접점을 마련한 문재인 정부를 적극 참고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북한 비핵화’가 더욱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 다시 부상

자주파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동영 장관이 전면에 나선 가운데, 이종석 국정원장이 물밑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원장은 취임사에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의 돌파구를 여는 데 기여해야 한다”며 국정원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이 페이스메이커론 제기 후, 중국을 설득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방안은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 원장이 최근 중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정부가 경주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봉합된 한미 관계를 고려, 당분간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머물 것이라고 관측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면,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트럼프-이재명 대통령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이재명 정부 내 자주파를 견제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국은 정동영 장관의 최근 잇따른 발언이 선을 넘고 있다고 판단, ‘경고’ 신호를 보냈다. 이달 초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정 장관을 면담, ‘대북 제재 유지와 한미 연합 훈련, 북한 인권 문제 중시’ 입장을 강조한 것은 백악관의 특별 훈령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일각에서는 자칫 자주파를 중심으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한미 갈등의 단초가 될까 우려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는 “트럼프 2기 들어 북미 관계는 아직 초기 단계로 시간이 남아 있다”면서도 “내년 4월 전후까지 미국의 대북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피스메이커로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