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주도하는 인공지능(AI)·반도체 공급망 관련 전략 협력체 ‘팍스 실리카 서밋(Pax Silica Summit)’의 첫 회의가 12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네덜란드, 영국, 호주, 아랍에미리트(UAE), 이스라엘 등 8국이 정식 회원으로 참여했고 대만, 유럽연합(EU), 캐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특별 초청을 받았다.
13일 우리 외교부는 김진아 2차관이 수석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밝히며, 팍스 실리카를 “미측 제안으로 발족한 경제안보 협의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팍스 실리카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AI 공급망 확보 동맹”으로 규정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년에 가급적 조기 방중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가운데, 미·중의 ‘첨단 기술 공급망’ 경쟁이 한국 외교에 상당한 부담을 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美 “AI 주요 회사·투자자 모여”
미 국무부의 설명에 따르면 ‘팍스 실리카’는 평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팍스(Pax)와 반도체의 원자재인 실리카(Silica·이산화규소)를 합친 말이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무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동맹·우방들과 함께 핵심광물·반도체·에너지 공급망 안보를 확보해 AI 경쟁에서 뒤처지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미국의 구상이 담겨 있다. 로마 제국의 통치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나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뜻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처럼 미국이 첨단 기술 경제를 계속 주도하겠다는 의미도 있다.
미 국무부는 팍스 실리카 설명 자료에서 “글로벌 AI 공급망에서 가장 중요한 회사와 투자자들이 참여국 내에 있다”며 각 기업을 명시했다. 한국에서는 반도체 회사인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네덜란드에서는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거명됐다. 일본 기업으로는 소니·히타치·후지쓰가, 호주에서는 광산기업 리오틴토가 언급됐다. 미국 IT 기업 알파벳 자회사로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구글 딥마인드도 거론됐고 싱가포르의 국부 펀드 테마섹과 UAE의 국영 투자 회사 MGX도 포함됐다. 이는 미국의 동맹·우방국을 규합해서 AI 기술 개발과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자금, 원자재, 기술을 모두 통제하겠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12일(현지 시각) 회의 이후 미국, 한국, 일본, 영국, 호주, 싱가포르, 이스라엘 등 7국은 “비시장적 관행에 공동 대응한다”는 내용의 ‘팍스 실리카 선언’을 채택했다. 중국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혁신과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비시장적 관행” “과잉 생산 및 불공정 덤핑 관행과 같은 시장 왜곡” 등의 표현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 국무부는 또 팍스 실리카를 통해 ‘우려되는 국가들’의 과도한 접근과 통제로부터 민감 기술과 핵심 인프라를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이 또한 중국을 겨냥한 표현이다.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행정부가 희토류와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맞서기 위해 5개 동맹국을 영입했다”며 한국과 일본, 호주, 이스라엘, 싱가포르의 참여에 특히 의미를 부여했다.
◇中 “美 계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중국 외교부의 궈자쿤 대변인은 팍스 실리카에 대해 “모든 당사국은 시장 경제와 공정 경쟁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을 배제하는 미국 주도의 협력체 등장이 자유 시장 원칙을 왜곡한다는 취지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12일 팍스 실리카 출범 소식을 전하면서 전문가들을 인용해 “시장 원칙을 왜곡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동맹국 간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했다.
이런 중국의 반응은 이 대통령의 조기 방중을 원하는 우리 정부의 외교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일 외신 회견에서 “가능한 빠른 시간 내 중국을 방문해 광범위하게 여러 분야에 대해 논의했으면 좋겠다”며 연내(年內) 방중을 원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은 줄곧 미국이 주도하는 수출 통제나 공급망 협력에서 한국이 이탈하기를 원해왔다”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이 대통령의 회담을 성사시키는 대가로 미국의 대중 견제에서 빠질 것을 요구하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