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간 확장억제 협의체인 핵협의그룹(NCG) 제5차 회의가 1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렸다. 양국에서 이재명 정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첫 NCG 회의다. 전임 정부 시절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한국의 핵작전 지원을 구체화하기 위해 만든 협의체가 정권 교체 이후에도 계속 가동된다는 점에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번 회의 후 한미가 발표한 공동언론성명에는 북핵 위협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나 북한 정권에 대한 경고성 문구가 전혀 없었다. ‘북한’이란 단어 자체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5일 트럼프 행정부가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에는 ‘북한 비핵화’에 관한 표현이 일체 없었다. 이어 NCG 공동성명에서도 북핵이 사라진 것이다.
이날 공개된 5차 공동언론성명에서 미국은 핵을 포함한 “모든 범주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해 한국에 대해 확장억제를 제공하는 공약을 재확인”한다고 했다. 하지만 1·2·4차 공동성명에 포함됐던 “미국 또는 동맹국에 대한 북한의 어떠한 핵공격도 용납할 수 없으며, (김씨)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란 표현은 삭제됐다. 이 표현은 양국 국방장관 간의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포함됐지만, 지난달 열린 SCM 공동성명에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희망하는 미·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표현을 삭제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4차례의 NCG 성명에는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관련 내용이 항상 포함됐지만 이번에는 삭제됐다. 반면 한국 측은 이번 성명에 최초로 “한국이 한반도 재래식 방위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의 역할 확대를 요구하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北核 쓰면 정권 종말’ 빼고… ‘한국이 재래식 방위 주도’ 첫 명시
11일(현지 시각) 발표된 제5차 한미 핵협의그룹(NCG) 공동언론성명은 총 5항이다. 바이든 행정부 막바지인 지난 1월 10일 열린 제4차 회의 성명이 총 12항이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분량이 줄어들면서 한미가 핵 작전을 ‘공동 기획’ ‘공동 실행’하며, 이를 위해 ‘한반도 핵억제·핵작전 지침’을 논의한다는 내용은 모두 사라졌다. 우리 국방부는 이런 지적에 대해 “한미 확장억제 협력은 오히려 심화·구체화되고 있으며 이번 성명은 그 실질적 성과를 간결하게 담은 것”이라면서 “‘북핵 불용’ 의지는 확고”하다고 했다.
하지만 북핵 대응을 핵심으로 하는 양국의 NCG 성명에서 북한 언급이 사라지고 확장억제 관련 서술이 줄어들면서 미국이 북핵을 사실상 용인하고,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소홀히 하게 될 조짐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대북 경고 삭제, 미·북 대화 고려했나
NCG는 2023년 4월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워싱턴 선언’의 결과 창설됐다. 북핵·미사일의 고도화로 한국에서 핵무장론까지 일어나자,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한미 양국이 핵 전략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2023년 7월부터 지난 1월까지 열린 4차례의 NCG 공동성명에는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확인해 주는 표현이 줄곧 등장했다.
1·2·4차 공동성명에는 “한국에 대한 북한의 어떤 핵 공격도 즉각적이고, 압도적이며, 결정적인 대응에 직면할 것”이란 표현이 있었다. 3차 공동성명에서는 한미의 핵·재래식 통합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동맹의 억제 및 대응 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한반도 주변 미국 전략자산 전개’와 관련한 표현도 1~4차 성명에는 빠짐없이 들어갔다. 북핵 위협 억제를 위해 미국 핵항모나 핵잠수함, 전략폭격기 등을 얼마나 정례적·가시적으로 전개할지를 한미가 논의했다는 취지였다.
이번 5차 성명에는 이런 표현들이 모두 사라졌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본지 통화에서 “‘핵 도발 시 끝’이라는 경고를 강력하게 던지면서 북한을 압박할 수 있어야 하는데, 트럼프 미 대통령의 미·북 회담 의지가 남아있는 만큼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메시지는 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미북 대화를 위해 메시지 관리를 할 수 있지만 그 결과 북한이 오판할 가능성도 커졌다”며 “실제로 트럼프 정부 들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가 줄어드는 추세인 것은 우려된다”고 했다.
◇NCG 관련 훈련도 北 의식해 ‘로키’
이번 5차 성명에서는 오히려 한국 측이 “한국이 한반도 재래식 방위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NCG 성명에는 처음 들어간 표현이다.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원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동맹의 역할 확대를 원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과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12일 “이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이것(전작권 전환)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점은 안다”면서도 “그 시간 내에 조건을 충족해야겠지만, 또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한미 양국이 ‘핵협의그룹 도상연습(NCG TTX)’을 지난 9월 실시하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은 사실도 이날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NCG와 연계해 북한의 핵 사용 시나리오를 상정해 두고 위기 관리 및 군사적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연습이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NCG TTX는 지난 9월 중순 한미 핵·재래식 통합 도상 연습(CNI TTX)과 함께 실시됐다. 한미 양국 전략사령부와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 등도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방부와 주한 미군은 훈련 실시 사실을 공개하거나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반발을 의식해 한미가 ‘로키’ 대응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3·4차 NCG 회의에서 우리 측을 대표했던 조창래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NCG 공동언론성명에 특정 표현이 없다고 해서 확장억제에 대한 의지가 약화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면서도 “지난 정부에서는 ‘북한 정권 종말’과 같은 표현을 쓰거나 관련 연습을 공개하면 북한을 억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봤는데, 현 정부 판단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