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17일 북한에 군사회담을 제의했다. 1953년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당시 남북 간 군사분계선(MDL)을 확인하기 위해 설치했던 황색 표지물 상당수가 유실돼 혼선이 생기고 있는 만큼, 이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열자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정부가 남북회담을 공식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홍철 국방부 정책실장(예비역 공군 준장)은 이날 공개 담화문을 통해 “최근 북한군이 비무장지대(DMZ) 내 MDL을 넘어 우리 지역을 침범하는 상황이 지속 발생하고 있다”며 “남북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남북 군사 당국 회담을 개최해 군사분계선의 기준선 설정을 논의할 것을 공식 제안한다”고 했다.

남북한을 가르는 MDL은 정전협정에 지도로 첨부됐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각각 이를 확인할 표지판 1292개를 설치했다. 하지만 1973년 표지판을 보수하는 유엔사 측에 북한군이 총격을 가한 후 52년간 보수가 중단돼, 현재 우리 군이 식별 가능한 표지판은 200여 개에 불과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장하면서 지난해부터 북한군은 MDL 일대에 장벽 설치 등 ‘국경선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이 MDL을 침범하는 일이 지난해 10회 미만, 올해 들어 10회 이상 일어나자, 군 당국이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보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녹슬고 글자 지워진 군사분계선 표지판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 녹슨 군사분계선(MDL) 표지판이 서있다. /조선일보 DB

◇李정부 첫 남북회담 카드… 軍 “우발적 충돌 방지용”

대통령실은 17일 군이 북한에 남북 군사당국회담을 공식 제안한 것과 관련해 “우리 군은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기준선 설정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이날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관련 회담 제안을 위한 담화’를 통해 북한에 군사회담을 공개 제의한 배경엔 꽉 막힌 남북 관계가 있다. 국방부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북한군의 MDL 월선과 관련해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여러 차례 협의하자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날 오전·오후에도 유엔사를 통해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북한이 응답하지 않자, 담화문을 통해 회담을 공개 제의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4월부터 MDL 일대 국경선화 작업을 하고 있다. 군사분계선 일대 4개 장소에서 총 10㎞ 길이의 대전차 방벽도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수 명, 때로는 수십 명이 MDL 남측으로 넘어왔다가 우리 군의 경고 사격을 받고 돌아가는 일이 수차례 반복됐다. 김홍철 국방부 정책실장은 회담을 제의하는 담화문에서 “북한군의 군사분계선 침범과 절차에 따른 우리 군의 대응이 지속되면서 비무장지대 내 긴장이 높아지고 있으며, 자칫 남북 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도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MDL 인식 차이 인정 이례적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군의 MDL 월선은 지난해 10회 미만, 올해 10회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달 들어서도 북한군은 수차례 MDL을 월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북한군의 MDL 월선에 대해 김 실장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설치했던 군사분계선 표지물이 상당수 유실되어, 일부 지역의 경계선에 대해 남측과 북측이 서로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남과 북이 생각하는 MDL이 다르다는 지적은 과거부터 있었다고 한다. 군 소식통은 “MDL은 유엔군사령부가 제공한 좌표로 구분하지만, 좌표를 잇는 선에 대해서는 남북의 인식이 다르다”며 “남아있는 표지물도 지도상 좌표와 실제 위치가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국방부가 공식적인 담화문에서 “인식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언급한 것은 처음으로, 이례적인 일로 알려졌다. 북한의 MDL 월선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은 “지난 9월 합참은 북한의 MDL 침범에 대한 경고 사격 등에 대해 (국회에 보고하면서) 언론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MDL 선상에 대한 남북의 인식이 다르다’는 내용은 비공개를 요청했다”며 “그랬던 군 당국이 갑자기 담화문을 통해 인정해버리니 당황스럽다”고 했다.

◇북, MDL 침범에 적반하장

그간 북한은 MDL을 먼저 침범해 놓고, 우리 군이 경고 사격을 하면 ‘도발’이라며 주장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지난 8월 우리 군이 MDL 남측으로 넘어 온 북한군을 향해 경고 사격을 하자, 북한은 고정철 북한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명의로 “한국군 호전광들이 남쪽 국경선 부근에서 차단물 영구화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우리 군에게 엄중한 도발 행위를 감행했다”는 담화를 냈다. 북한군 담화에는 “우리 군대는 정상적인 국경 강화 사업의 일환으로 대한민국과 접한 남부 국경을 영구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차단물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주장도 담겨 있었다.

이 때문에 군이 ‘군사적 긴장 완화’를 강조해 온 이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의식해서 회담을 제의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 대통령 취임 후 국방부는 대북 확성기 철거와 대북 방송 중단 등 유화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해 왔다. 군 소식통은 “이번 국방부 담화문으로 인해 향후 북한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우리 측이 대응할 논리가 없어졌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은 올 연말 당 중앙위 전원회의부터 ‘적대적 두 국가’를 법적으로 확정하는 조치에 나설 텐데 지금 남측과 대화에 응하는 것은 전략적 기조와 맞지 않는다”며 “정전협정에 근거한 군사분계선 관리 문제 역시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가 아닌 한국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군사분계선(MDL)

6·25 정전협정에 의해 설정된 남북한의 경계선. 경기 파주시 장단면에서 동해의 강원 고성군까지 248㎞에 이르며 휴전선(休戰線)으로도 불린다. 군사분계선을 표시하기 위해 500m 이내 간격으로 표지판 1292개가 설치됐지만 현재 상당수 유실됐다. 남쪽과 북쪽으로 2㎞씩 총 4㎞ 구역이 비무장지대(DMZ)로 설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