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폐막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는 20년 전 부산 APEC 때와는 현격하게 다른 상황에서 개최된 후, 1일 폐막했다. 20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열린 이번 회의는 국격과 위상이 높아진 한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의 불안한 현실을 재확인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5년 당시 미국의 명목 GDP(국내 총생산)는 약 12조 4165억 달러, 중국은 약 2조 2343억 달러, 한국은 약 7913억 달러였다. 이같은 미중간 격차를 바탕으로 열린 부산 APEC에서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자유무역을 통한 번영과 협력”을 약속했다.
당시 부산이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의 낙관과 개방을 상징했다면, 이번 경주는 미·중 패권 경쟁, 보호무역 득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공급망 불안,그리고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이 만들어낸 복합 위기 속에서 열렸다. 중국의 GDP(지난해 약 18조 7400억 달러)는 미국 GDP의 약 3분의 2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경주 APEC을 계기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6년 만의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은 김해공항 군 기지에서 회담을 갖고, 미·중 무역 전쟁으로 부과된 추가 관세와 보복 조치의 시행을 1년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경색된 미·중 관계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숨통을 틔우며, 경주 APEC을 계기로 ‘관세 휴전’이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트럼프 부재, 시진핑 존재감
정치적으로 이번 경주 APEC은 미국의 리더십 부재가 두드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까지 왔지만 본회의 직전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대신 참석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자유무역·개방경제’ 의제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1989년 호주에서 시작된 APEC은 자유무역과 투자 확대를 핵심 가치로 삼아왔지만, 경주 APEC은 새로운 변곡점이 됐다. 이번 ‘경주 선언’에서는 ‘자유무역’이나 ‘WTO’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글로벌 무역 체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식한다”는 문구만 남았을 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보호무역 기조가 아시아 무대에서까지 확인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리더십 회피로 공급망 안정, 디지털 통상, 탈탄소 전환 등 핵심 의제에서 구체적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
◇AI·반도체·차 CEO들의 ‘깐부 회동’… 장외서 기업 외교 빛났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GDP 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90.9%로, 1990년 51.3%에서 크게 증가했다. 이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자유무역의 원칙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국익 차원에서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의장국임에도 이를 주도하지 못했다. 김성식 전 국회의원은 “(경주 APEC을 계기로) 자유무역과 WTO가 금기어가 되었다. 국제 질서의 변곡점이 재확인됐다”며 “그것이 불가역적이라면, 우리의 전략은 어떤 익숙함과 결별을 요구받는 것인가”라고 했다.
반면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의 공백을 치밀하게 활용했다. 그는 “진정한 다자주의를 실천하고, WTO를 중심으로 한 무역 체제의 권위를 강화하자”고 강조하며 중국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공산당 통제 경제를 운영하는 시 주석이 자유무역을 외치는 아이러니는 내년 중국 선전 APEC에서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 외교의 부상
정치적 성과가 미흡했던 반면, APEC CEO 서밋(기업인 회의)은 이례적인 주목을 받았다. 1700여 명의 글로벌 CEO와 경제 리더가 모여 AI, 반도체, 청정에너지, 공급망 복원력을 논의하며 복합 위기 시대의 산업 해법을 모색했다.
삼성전자·현대차·LG 등 한국 주요 그룹은 총 100억달러 이상의 투자 MOU를 체결했다. 특히 AI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한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공급망 구상이 주목받았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함께한 ‘깐부 치킨 회동’은 APEC의 장외에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세 지도자는 AI·자동차·반도체를 잇는 협력 구상을 논의했고, 젠슨 황은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정인 AI 중심지”라며 GPU(그래픽 처리 장치) 26만 장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이제 세계는 정부 주도의 외교, 협상보다 민간 산업이 주도하는 것을 보여준 첫 APEC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 문화 알리는 계기 돼
출범 넉 달 만에 첫 APEC을 치른 이재명 정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비교적 선전했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3500억달러 투자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인 결과, 최종적으로 2000억달러를 매년 200억달러씩 단계적으로 집행하는 절충안을 이끌어냈다. 또한 한국의 숙원이던 핵잠수함 보유에 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내 건조를 조건으로 한 원칙적 승인을 받아냈다. 시진핑 중국 주석,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의 첫 회담도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됐다.
경주 APEC은 단순한 국제 회의가 아니라,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무대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도심 한가운데 고분이 자리한 경주의 독특한 도시 구조는 각국 정상과 기업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진핑 주석은 만찬 자리에서 경주 황남빵을 언급하고, 백악관 대변인이 ‘황리단길’을 찾아 K뷰티 제품과 전통 공예품을 구입한 것이 SNS에서 화제가 됐다. 각국 정상의 배우자들이 김혜경 여사와 함께 불국사를 방문한 장면도 외신 뉴스로 다뤄졌다.
하지만, 이번 APEC은 트럼프의 조기 귀국으로 그 중요성이 반감되고, 미·중 간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기회도 사라졌다. 미국과의 협상은 지난 29일 정상회담 이후 아직 합의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자칫 합의문 채택이 불발되거나,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올 경우 역풍이 불 것이라는 우려도 잠복하고 있다. 수출로 성장해온 한국이 자유무역의 가치를 선도적으로 주장하지 못한 것은 향후 통상 외교 전략의 재정립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때문에 겉으로는 성공적인 개최였지만, 실질적 성과는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