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막 예정 시각인 오전 10시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회의장인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각국 대표는 국가명의 ‘알파벳 역순’으로 입장했고, 그 순서대로라면 시 주석은 마지막에서 다섯째로 입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특별 초청국 UAE(아랍에미리트연합)의 칼리드 빈 모하메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자까지 입장한 뒤에도 약 6분 간 시 주석은 입장하지 않았다.
시 주석은 사전 예상보다 15분쯤 늦은 오전 10시 2분쯤에야 행사장에 들어섰다. 21개 APEC 회원국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입장한 것이다. 시 주석은 영접장에 서서 기다리던 이재명 대통령 쪽으로 걸어가 아무 말 없이 악수를 했다. 이 대통령 취임 후 첫 한·중 정상의 만남이었지만, 엷은 미소를 지은 이 대통령과 달리 시 주석의 얼굴엔 별 표정이 없었다.
◇ 한·중 회담에 드리운 ‘원잠’ 변수
회의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말했고, 시 주석은 “경주가 역사가 깊은 도시라고 알고 있다. 매우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외교부는 내년 APEC 정상회의를 중국이 개최할 예정이라, 후임 의장국에 대한 예우로 중국 차량 행렬이 뒤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과 취임 직후부터 “주변국과의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며 윤석열 정부에서 다소 소원했던 한·중 관계 개선을 주장했다.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 실용 외교 구상에서도 중국은 중요한 하나의 축이다. 이에 따라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관계 복원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시 주석의 방한을 ‘국빈 방문’으로 성사시켰다.
그러나 미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던 정상 간의 첫 대면이 1일 열릴 한·중 정상회담의 예고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지난 29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을 도와 달라며 “디젤 잠수함은 북한이나 중국 쪽 잠수함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 “(한국 원잠이) 한반도 동해·서해에서 해역 방어 활동을 하면 미군의 부담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미군의 중국 견제에 동참하겠다는 취지로 들리는 발언이었다. 전직 정부 고위 당국자는 “시 주석이 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일국의 안보 강화가 타국의 안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로 원잠 도입 계획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 사드 배치 때와 비슷한 강도로 반대하겠다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아태 공동체” 강조한 시 주석
시 주석은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APEC 정상회의 연설에서 다자무역·다자주의를 강조하며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지난 30일 미국으로 돌아간 기회를 이용해 ‘미국우선주의’에 반대되는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건설”을 주창한 것이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고 있다면서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을수록 한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가야 한다”고도 했다.
우리 대통령실도 한·중 회담에서 ‘민생 문제’ 즉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2단계 협상인 서비스·투자 협상의 실질적 진전이나 산업·공급망 협력 등이 협의되길 기대하고 있다. 양국 간 비자 면제 유지 등 민간 교류 확대나 최근 이슈로 떠오른 캄보디아 범죄 공동 대응 등도 예상되는 의제다. 이 대통령이 최근 중국 신화통신 인터뷰에서 말한 “한반도 핵 문제의 실질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도 주요 의제다.
다만 원잠 외에도 양국 간엔 민감한 현안들이 있다. 한국 측은 중국의 서해 불법 구조물 철거,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 제재 해제, 한국 문화를 제한하는 한한령(限韓令) 해제 등을 원하고 있다. 중국 측은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 등에서 자국의 입장을 존중하고, 미국의 대중 기술 수출 통제 등에 협조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