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신임 일본 총리가 취임한 21일,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는 31일 개막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에서 이틀간의 이례적 해외 출장이었다.
위 실장은 새로 임명된 이치가와 게이이치 국가안전보장국(NSS) 국장을 만나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 간 첫 회담 일정을 조율하고 ‘안정적인 한일 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카이치 총리를 만든 ‘킹 메이커’ 아소 다로 전 총리와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면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통상 일본에서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고 NSS 국장이 바뀌면, 일본 측에서 방한하는 것이 관례지만, 이번에는 한국이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대통령실은 위 실장이 “한일 관계의 발전적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방일했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새 내각하에서도 한일 관계의 안정적 발전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정부·국회·민간 간 다양한 협력 채널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위성락의 전략적 방일… “北 끌어내려면 한일관계 좋아야”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위 실장의 이번 방일은 단순한 의전이 아닌 전략적 외교 행보다. 그는 다카이치 내각의 강경 보수 성향이 향후 독도·야스쿠니 문제에서 한일 관계를 흔들 가능성을 우려해 조기 관리에 나섰다. 동시에 APEC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포석도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APEC 본회의 불참을 통보한 가운데 ‘경주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의 한일 외교 기조에는 이 대통령에게 “반일친중(反日親中) 이미지를 벗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고언(苦言)했던 조현 외교부 장관뿐만 아니라 위성락 실장의 한일 관계 중시 전략이 깊숙이 배어 있다.
이재명-이시바 세 차례 회담
이재명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취임 후 100일 동안 이시바 시게루 당시 총리와 세 차례 만나며 셔틀 외교 복원을 추진했다. 첫 회담은 6월 G7 정상회의에서, 두 번째는 8월 도쿄 방문 시, 세 번째는 9월 부산에서 고별 회담 형식으로 열렸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만에 이시바 총리를 세 번이나 뵈었다. 이게 셔틀 외교의 진수”라며 한일 관계 정상화를 정부 외교의 핵심 성과로 평가했다. 민주당 대표 시절, 일제 시대 징용 배상,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문제 등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위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전례없이 변덕스러운 정책을 이겨 내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한일관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미 관계가 관세·투자 문제로 불안한 가운데 한일 관계까지 흔들릴 경우 외교적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본다. 이때문에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일관계에 기반한 3국 협력을 강조한다. 위 실장은 지난 8월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정부는 한미 동맹과 한일 협력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한 한·미·일 협력을 외교의 중심축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 도쿄를 거쳐 미국 워싱턴 DC를 연이어 방문한 것도 이런 외교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한일 협력으로 북한에도 메시지
한일 관계를 중시하는 위 실장의 외교 구상은 남북 관계 개선 방안과도 연결된다. 위 실장은 우호적인 한일 관계가 남북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남북 대화를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정부 시절처럼 한일 관계와 남북 관계를 ‘병행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전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배경 중에는 한일 관계 악화도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위 실장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미·북 관계, 북·일 관계까지 묶는 패키지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현실주의 노선은 9월 유엔총회 브리핑에서도 드러났다. 위 실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두 국가론’ 발언에 대해 “정부는 두 국가론을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다”며 “남북 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인식이 김정은 정권은 물론 주변 국가들의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비단 정 장관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김정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미 동맹, 한·미·일 3국 협력을 희생시켜서라도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이재명 정부의 친북 성향 인사들에 대한 경고였다.
위 실장의 이 발언은 북한 체제 문제에 민감한 미국 측 인사들을 안심시키며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신뢰를 깊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위 실장의 한미 동맹 중시 철학은 트럼프 대통령의 APEC 때 당일치기 방한 계획을 1박 2일로 연장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양국의 실무진 사이에는 이재명·트럼프 대통령이 ‘국빈’으로 회담 후, 경주 보문단지나 불국사 등을 산책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역시 서울은 방문하지 않지만, ‘국빈 방문’ 형태로 약 3일간 한국 체류를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위 실장은 한미 동맹, 한일 관계를 중시하지만 자신이 동맹파로 분류되는 것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나보고 무슨 파(派)라고들 하는데, 나는 대통령실 안에서 (미국에) 아주 강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3500억달러 투자 문제 등으로 미국과 부딪칠 때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 실장은 정권 내부의 ‘동맹파와 자주파’의 갈등이 격화될 경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진할 수 있기에 가급적 자주파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 이종석 국정원장 등과 맞대결 하는 것을 피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