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 외교부 장관이 최근 언론 인터뷰 할 때마다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 장관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원자력 협정 개정 협상 대표를 맡아 우리 정부의 초기 협상안을 설계한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한국의 현역 외교관 중에서 이 사안에 가장 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 장관은 최근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포함한 완전한 핵연료 주기 확보는 원전 강국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필요”라고도 했습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유사한 발언을 하면서 한미 양국이 관세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 차이가 크지만, 원자력협정 일부 조항에 잠정 합의를 이뤄 합의문 초안 마련 단계까지 진전됐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40년 만의 협정 개정 준비
조 장관이 깊이 관여한 원자력 협정은 1974년 개정된 뒤 40년간 유지되다가 2015년에 이르러 일부 수정됐으나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원자력 협정은 미국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 제123조에 근거해 체결된 것으로, 미국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123협정’으로 불렸습니다. 이 조항은 미국과 타국 간 원자력 협력의 절차와 조건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핵물질 및 기술의 평화적 이용 보장, 핵비확산 원칙 준수, IAEA 안전조치 적용이 주요 내용입니다.
한국의 외교·안보,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은 123 협정을 ‘족쇄’로 인식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개정을 위해 2009년부터 움직였습니다. 한국은 당시 원전 설비 기준 세계 5위의 원자력 강국이지만, ‘족쇄’에 묶여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에 관한 연구와 실험이 크게 제한 받아왔습니다.
이에 따라 2009년 5월 조 현 에너지·자원 대사가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전담 대표’로 임명됐습니다. 조 대표는 그해 12월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으로 승진, 2011년 주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 전까지 약 2년간 협상을 총괄했습니다.
조 대표가 발탁한 개성 강한 외교관 이경렬
조 대표는 40년만의 원자력 협정 개정이 쉽지 않은 협상이 될 것으로 보고, 협상 부대표로 주폴란드 대사관에 근무중이던 이경렬 공사참사관(나중에 주앙골라 대사)을 서울로 불러들였습니다. 이 공사는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의 ‘3대 괴짜’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아이디어도 많고, 자신의 주장과 개성이 강한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주베트남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한미 FTA 협상을 총괄하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 의해 발탁돼 워싱턴 DC의 주미대사관에 부임했는데, 다시 한번 미국과의 어려운 협상에 투입된 겁니다. 그는 2007년 한미 FTA 협상에 반발하며 2년 만에 주미대사관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자원해 나가면서 외교부 안팎에 화제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반미’ 성향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이 공사는 지난 5월 이창천이라는 필명(筆名)으로 펴낸 ‘명품 외교의 길-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에서 “외교부는 미국을 하느님처럼 숭상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막전막후 60회 참고. 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5/05/18/UEZP6SRJKFBNNHFOEH2VHSDFHQ/>
스스로를 ‘좌파 외교관’으로 칭한 그는 지난 8월 펴낸 ‘브라보 한미동맹-숭미동맹의 그늘 벗어나기’에서는 한국을 “숭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조 현 대표는 원자력 협정 개정을 위해 미국에 비판적이며, 협상에 능한 외교관이 필요했는데, 이 공사를 ‘적격’으로 판단한 겁니다. 조 대표는 이 공사를 불러 들인 후, 그가 지나치게 행동할 것을 우려, “반드시 내가 시키는 대로 내 지시를 받고 일 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워싱턴서 첫 협상, 파이로프로세싱이 쟁점으로
40년 만의 개정을 위한 첫 협상은 2010년 10월 25일 워싱턴 DC에서 열렸습니다. 한국 측은 조 현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이, 미국 측은 로버트 아인혼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보가 수석대표로 참석했습니다.이 회의에는 외교부와 과학기술부, 지식경제부,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수력원자력 등 관계 기관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양측은 이 자리에서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을 포함한 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안의 공동연구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 핵연료를 고온 전기화학적으로 처리해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 유용 물질을 분리·재활용하는 기술입니다. 한국은 이를 통해 원자력 재활용률을 높이려 했으나, 미국은 플루토늄 추출 가능성을 이유로 핵확산 우려를 제기했습니다.
“F-35와 연계 건의했다”, “그런 기억이 없다”
당시 부대표였던 이경렬 대사는 자신의 저서 ‘명품 외교의 길’에서 협상 비화를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요구는 파이로프로세싱을 당장 실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미국과 함께 연구해 향후 상업화 여부를 검토하자는 소박한 제안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협상에서 실질적 성과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의미 있는 양보를 이끌어내려면 다른 사안과의 연계 전략이 필요하다”고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나중에 대외전략기획관 거쳐 윤석열 정부에서 국가안보실 1차장) 에게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논의 중이던 F-35 전투기 도입 문제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즉, F-35 스텔스기 도입을 추진하는 대신 미국이 원자력 협정 요구 사항을 수용하도록 유도하자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비서관은 ‘턱도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이 대사는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민감한 문제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고 평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태효 전 1차장은 10일 전화 통화에서 이 대사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김 전 차장은 “원자력 협정 개정 협상 당시 F-35 구입과 연계하자는 얘기는 아무도 안 했다. 그분이 지나가는 얘기로 했는지는 모르나, 기억에 없다”고 했습니다. 김 차장은 “원자력 협정 개정과 국방부의 무기 구매하고 연계하자는 얘기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라고 했습니다.
“협상장을 뛰쳐 나오고 싶었다”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을 동등한 동맹으로 대하기보다는 ‘비확산 정책의 관리 대상’으로 간주했습니다. 우리 정부 관계자 중에는 “미국은 우리의 주장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협상장을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국무부는 비확산 원칙을 우선시하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고, 에너지부는 원전 산업 협력을 통한 미국 기업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해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미국측 대표인 로버트 아인혼 특보의 강경한 태도는 한국 측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는 한국이 농축·재처리 능력을 확보할 경우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특히 한국 원자력연구소가 2000년 고농축 우라늄 0.2g 분리 실험한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아인혼을 비롯한 미국의 비확산 진영은 이를 동북아 안보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사례로 인식했습니다. 아인혼 특보는 미국은 한국이 절대로 협상을 깰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를 이경렬 부대표가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부대표는 2011년 7월 워싱턴에서 열린 3차 협상에서 자신이 준비한 한미 원자력 협정 비전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그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한국의 원하는 것은 매우 소박한 것으로, 핵 비확산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의 지평을 넓힐 목적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추진 할 것들인데, 상호 존중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원자력 협정 의 개정이 필요하며,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할 거라는 사실을 믿고 우리가 당신들을 떠나지 않게 해 달라.”
그러자 이 부대표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인혼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어조는 미국을 비난하고 추궁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 식의 인식을 갖고 협상에 임한다면 경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국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검토할 것입니다.”
이 부대표는 아인혼을 한국을 멸시하는 ‘멸한(蔑韓) 3인방' 중의 한 명이라고 지칭하며 “영화 ‘한니발’의 렉터처럼 조용히 상대를 갉아먹는 인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한니발’에서 렉터 박사는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잔혹한 식인 살인범으로,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심리전의 대가로 나옵니다. 세련된 말투와 지적 매력을 지닌 동시에 냉혹한 본성, 광기로 ‘악의 지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인데, 아인혼을 그에 비유한 겁니다. 저는 이처럼 과장된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와의 협상에서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며 모멸감을 느낀 인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박노벽 대사의 서한에 6개월 넘게 답신 안해
조 현 대표에 이어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 대표를 맡은 이는 박노벽 전 주러시아 대사였습니다. 박 대사는 2012년 2월, 협상 상대인 아인혼에게 밀봉된 서한을 전달했습니다. 이 서한에는 2014년 상반기 만료를 앞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본격화하자는 제안과 함께, 한국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인혼은 반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신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통상 외교 서한을 보내면 “입장을 잘 알겠다. 적절한 시기에 만나자”는 형식적인 답신이라도 있지만, 그는 그마저도 생략했습니다.
미, 북한 핵 보다 남한 핵 무장 걱정하나
저는 미국과 한국에서 수 차례 아인혼을 만나왔습니다. 2007년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 후, 그때 가장 먼저 만난 고위급 인사가 아인혼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23년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회의에서도 그와 만나 한국의 핵 무장론에 대해 대화한 바 있습니다.
그는 절대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아인혼이 한국을 동맹국으로 보기보다는 ‘핵 확산 우려 국가’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북한이 핵 국가로 변해가는 것 보다 오히려 한국이 핵무장하는 것을 더 우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인혼은 현재 국무부에서 떠나 싱크탱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비확산팀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들에겐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는다’는 평판이 따라 다닙니다. 조 현 장관이 어떤 논리로 이들을 설득하며 원자력과 관련한 관련한 우리의 권리를 확보할 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