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LA에서 “핵과 미사일 보유가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북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는데, 이재명 대통령이 뉴욕에서 이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25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한국경제설명회(IR) 투자 서밋’에서 북한의 핵 개발을 ‘체제 유지용’으로 규정하며, 남한이 북한을 위협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핵무기는 이미 충분히 확보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에 대한 우려는 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북한을 자꾸 다른 이유로 자극하고 도발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북한의 핵 개발을 ‘체제 유지’ 차원으로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노무현 대통령의 LA발언을 모방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 2004년 부시 재선되자 ‘LA 연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칠레 APEC 정상회의 참석과 남미 3국 순방을 위해 출국 후 미국 LA에 들렀습니다. 비행기가 한 번에 남미까지 갈 수 없기에 LA에 들러 교민들을 만나고 국제문제협의회(WAC)에서 외교안보 전문가 등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13일 오찬을 겸한 WAC 연설에서 “솔직히 말하겠다”며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북한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체제 안전 보장을 받으려는 의도”라며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을 비판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과 6자회담 재개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보유에 일리가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누구를 공격하거나 테러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국과 미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앙 일간지는 11월 15일(월) 1면 톱기사로 이를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LA 발언은 즉흥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노 대통령이 준비된 원고를 그대로 읽지 않고, 즉흥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준비가 있었습니다. 2004년 노 대통령이 ‘LA 연설’한 11월 13일은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기조를 막고 북핵 문제의 장기화를 차단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취임 후, 북핵 문제를 외교안보의 최대 현안으로 다루면서 LA 발언과 유사한 발언을 청와대에서 해 왔습니다. 고영구 국정원장이 노 대통령 LA 발언 직후인 11월 24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노 대통령의 LA 연설 내용은 그날 알았지만 그 내용은 대통령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은 일이 있어 새로울 게 없었다”고 말한 것이 그 방증입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인식에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이종석 NSC 사무차장(현 국정원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노 대통령은 부시의 재선을 계기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LA 연설에서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경우,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문을 준비,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자주파’ 측근들을 중심으로 독회를 했습니다.
반기문 장관, 외교부 파견 직원 통해 초안 입수
노무현 정부에서 소위 동맹파와 자주파의 대립과 대결, 경쟁은 현재의 이재명 정부 내에서보다 훨씬 더 거세고 격렬했습니다. 나중에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한미 관계를 중시하며 청와대 안팎 자주파의 동향을 주시했습니다. 반 장관은 2004년 11월 노 대통령의 출국 전에 ‘북한의 핵 보유는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LA 연설문 초안을 보게 됐습니다.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던 한 외교관이 노 대통령 연설문 초안을 보고 놀라서 반 장관에게 직보한 겁니다.
반 장관이 즉각 최영진 차관 등과 함께 검토한 결과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원고라 판단했습니다. 이 원고에는 “북한으로서는 핵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볼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 “무력행사는 협상 전략으로서 유용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등의 문구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반 장관은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이 문제를 제기, 노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반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그렇게 연설하시면 사표를 낼 수밖에 없다”고까지 했지만, 노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반 장관은 LA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LA에 도착한 후에도 노 대통령 만나 설득하려 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끝내 노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했습니다.
“북한과의 대화 수단으로 LA 발언했다”
11월 16일 LA 발언의 파장이 한국과 미국에서 커지자 당시 정부의 핵심 당국자가 기자들을 만나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이 당국자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기용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 LA 연설의 배경은?
“2년 동안 북핵 문제가 내용에서 진전이 없다. 현 시점을 분기점으로 보고, 한국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 차원을 고려한 것으로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
―실무자가 밝힐 수도 있는데 왜 대통령이 했나?
“실무자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고, 현 상황에서의 인식을 밝힌 것이다. 북핵의 평화적인 포기를 위한 수단의 유연성을 얘기한 것이다. ”
―미국에 무엇을 요구한 것인가?
“요구한 게 아니라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앞으로 나름대로 좀 더 적극적으로 끌고 가야겠다는 것이다. ”
―정부 외교 정책 실행이 바뀌나?
“갑자기 뭐 칼을 빼들고 할 것은 없다. 보다 더 열심히 하는 거다. 해결이 지체돼 왔다. ”
―대통령이 ‘북 핵개발에 일리가 있다’는 말은 왜 했나?
“대통령은 북핵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말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의 안전 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나. 대화 수단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문제 삼는 것은 상식 문제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한 발언을 두고 목적을 넘어섰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한국의 입장은?
“‘민족 공조냐, 국제 공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런 상황이 오면 정말 좋겠다. 지금은 남북 대화조차 안 된다. 한·미 관계는 동맹 관계다. 절대 같은 상황이 아니다. 대통령 발언은 한·미 관계에 따라 한 것이지 북한과 사전 교감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이 당국자가 “북한과 사전 교감은 없었으며, 대화 수단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문제 삼는 것은 상식 문제”라고 항변한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즉, 북한을 끌어내기 위해 더 장기적으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문제적 발언을 한 것을 자인했다고 봅니다.
남북 비핵화 선언 흔든 노 대통령
제가 당시 노 대통령이 LA에서 ‘북한 핵이 자위(自衛)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다’는 발언을 하고, 16일 정부의 핵심 당국자가 이를 적극 옹호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반도 비핵화 남북공동선언’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에 이어 핵심 당국자도 북한 핵 보유를 납득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그동안 북한의 핵무장을 견제해오던 유일한 남북한 합의가 사문화(死文化)될 위기에 처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북한의 핵 보유를 비판하는 중요 근거로 삼아온 비핵화 선언은 힘든 협상을 거쳐 1991년 말 체결된 후, 92년 2월 발효됐습니다. 이 선언의 제3항에는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선언에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를 명시해 두었기에 우리 정부는 북한에 대해 고농축 우라늄(HEU)에 의한 핵무기 계획을 포기하라고 촉구할 수 있었습니다. 북핵 6자회담에 참가하는 다른 국가들도 이 합의를 원용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정부 핵심 당국자가 잇달아 북한의 핵 보유를 이해한다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이 선언은 우리가 활용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남북회담과 북핵 6자회담에서 비핵화공동선언이 거론될 때마다 북한이 “노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 수뇌부가 우리의 핵 보유가 합리적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며 반박할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LA 발언으로 그동안 북한을 구속해 왔던 남북한 합의를 무효화한 것은 아닌지 우려했습니다. 당시 정부의 실무 관계자들이 노 대통령의 LA 연설을 옹호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말문이 탁 막히는 상황을 목도하기도 했습니다.
북, “노 대통령이 객관적 발언했다”고 긍정 평가
그렇다면 북한은 노 대통령의 유화적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LA 발언 직후인 2004년 11월 16일부터 5일간 장핑(Jean Ping) 유엔총회 의장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은 노무현 대통령이 LA 연설에서 객관적인 발언을 했다고 평가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인사들은 그에게 “핵무기 보유는 방어 목적이지 공격 의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사실이 국제무대에서 처음 확인된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뉴욕 발언에 대한 북한의 공식 평가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북한 외무성 김선경 부상은 유엔총회 참석차 25일 뉴욕에 도착했으며, 오는 29일 이 대통령이 연설한 같은 자리에서 북한을 대표해 연설할 예정입니다. 이 대통령이 북한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한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