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부임한 차지훈 신임 주유엔대사가 19일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주유엔대표부 홈페이지

주유엔 대표부 대사에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연수원(18기) 동기인 차지훈 변호사가 임명된 데 대한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차 대사는 19일 뉴욕 유엔 본부에서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신임장을 제정 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200여 국가가 매 시각 국익을 놓고 다투는 유엔에서 ‘외교 문외한’인 차 대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안팎에서는 “한국 교민들을 주로 상대하는 뉴욕 총영사라면 모를까, 유엔 대사를 잘못 임명했다”는 비판이 강합니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뉴욕 총영사와 유엔 대사의 역할을 혼동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외교부는 차 대사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17일 외교부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외교부는 “차 대사는 국제중재, 국제금융 등 국제 이슈에 대한 이해가 깊고 중재·협상 경험이 많은 법조인”이라며 “고도의 국제법 지식과 노련한 협상력을 요하는 유엔 무대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외교부의 이 같은 입장 배경에는 대통령실의 지시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유엔 대사의 위상과 역대 대사들

유엔 대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국제관계와 국제법, 다자회의에 정통한 이들이 맡아왔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북한의 천안함 폭침을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 등은 모두 주유엔 한국 대사에 역량 있는 외교관들이 기용됐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상당수 대통령은 유엔 주재 대사를 장관들이 참석하는 내각 회의 멤버로 지정해 외교 라인의 핵심 축으로 대우해 왔습니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수전 라이스 주유엔 대사,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니키 헤일리 주유엔 대사가 내각 회의에 정식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그 정도로 미국은 주유엔 대사를 외교 정책 결정 과정의 핵심 주체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은 1991년 유엔 가입 이후 차 대사 이전까지 14명의 주유엔대사가 활동해 왔습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4대 노창희 1991.2~1992.2

제15대 유종하 1992.2 ~ 1994.12

제16대 박수길 1995.1~1998.4

제17대 이시영 1998.4~2000.2

제18대 선준영 2000.3~2003.6

제19대 김삼훈 2003.6 ~ 2006.5

제20대 최영진 2006.5~2007.7

제21대 김현종 2007.7 ~ 2008.5

제22대 박인국 2008.5~2011.5

제23대 김숙 2011.5 ~ 2013.9

제24대 오준 2013.9 ~ 2016.12

제25대 조태열 2016.12~2019.10

제26대 조현 2019.10 ~ 2022.7

제27대 황준국 2022.7~2025.7

이 중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닌 이는 김현종 전 국가안보실 2차장 한 명뿐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주유엔대사 발탁한 것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외교부의 통상교섭조정관, 통상 본부장을 역임했기에 외교 문외한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유엔 가입 후 임명된 주유엔 대사 중에서 유종하, 조태열, 조현은 나중에 장관에 오를 정도로 비중이 큰 자리입니다.

전직 유엔 대사 A씨는 “유엔에 파견된 대사들은 매일같이 회의장에서, 로비에서 서로 만나 수시로 중요한 사안을 협의한다. 때로는 정부의 훈령을 받지 않고 결정해야 할 때도 많다. 몇 차례 만나 보고 대화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각수 전 외교부 1차관/연합뉴스

신각수 전 1차관 “심히 우려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엔 대표부 근무 경험이 있는 신각수 전 1차관(외시 9회)과 이준규(외시 12회) 전 외교협회장이 차 대사 기용을 공개 비판한 것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신각수, 이준규씨 모두 주일 대사를 비롯, 외교부의 요직을 지낸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신정부 초기에 이뤄진 ‘낙하산 인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이재명 정부의 ‘외교관 투톱’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조현 외교부 장관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외교가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신 전 차관은 페이스북에 “주유엔대사에 외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임명하다니, 이게 국익 외교고 실용 외교인지 참으로 걱정된다”고 직격했습니다. 그는 “중견 국가로 외교가 국가 생존에 중요한 한국 입장에서 유엔 외교는 특히 중요하다. 양자 외교보다 훨씬 어렵고 출중한 능력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신 전 차관은 1996년 2월부터 3년간 유엔대표부에서 참사관으로, 2004년 2월부터 2년간은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이같이 말합니다. “과거 대표부에서 두 번 5년 근무한 경험에 비추어, 대사가 다자외교 경험이 없으면 완전히 밑의 인력들이 뒷받침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공관장의 외교상 높은 비중에 비추어 즉각 투입 가능한 전력이 요구되는데 과연 가능할까요? 유엔에서 다루는 의제들은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다자외교를 잘하는 국가들은 다자 전문 외교관을 오랜 시간에 걸쳐 양성합니다.” 신 전 차관은 “한국의 국제 위상에 비추어 유엔 외교는 더욱 중요한데 심히 우려된다”고 했습니다.

이준규 전 외교협회장/연합뉴스

이준규 전 대사 “일 힘들어 차 대사가 후회하게 될 것”

이준규 전 외교협회장도 페이스북에서 “외교나, 유엔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주유엔 대사로 간다니 뭘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인지?”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외교부에서 외교안보연구원장, 주인도 대사, 주일 대사를 역임 후 한국외교협회장을 지냈습니다. 이 전 회장은 초임 근무지가 유엔입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을 때인 1984년 2월부터 3년간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바 있습니다.

이 전 회장은 차 대사가 앞으로 일이 힘들어 후회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는 “주 유엔 대사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려도 잘 살펴보면 대통령의 측근에게 포상으로 줄 만한 좋은 자리는 아니다”라며 세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 국내 정치적으로 조명을 받을 일이 별로 없다. 오래전의 KAL기 폭파 사건이나, 북한 핵실험 같은 대형 사건이 터지면 모를까. 지금은 반기문 사무총장이 아니라서 국내 고위 인사나 거물이 사진 찍으러 유엔에 갈 일도 없다.

둘째, 유엔에 일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대부분 매우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일이라 문외한 대사는 간섭할 수도 없고, 어디 끼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유엔 회의에 나가도 대개 국내 언론에서는 관심도 안 갖는 일이라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셋째, 폼 잡을 일이 거의 없다. 주유엔대사는 주재국 정부가 없어서 칙사 대접받을 일이 없고, 관할 교민이 없어서(뉴욕 인근 교민 관할은 주 뉴욕총영사관) 무슨 행사에 초대받을 일도 없다.”

이 전 회장은 이번 인사의 결말을 이렇게 예상합니다. “이번에 유엔 가시는 분(차지훈 대사)이 진짜 대통령 측근이라면 오래 못 있고 금방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적당한 측근이라면 재미없는 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계실지 모르고....”

부담 커진 외교부…차석대사 역할 주목

전·현직 외교관들은 신각수, 이준규 두 전직 대사의 글에 공감하며 당분간 유엔 차석대사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외교부는 중요한 공관에 ‘낙하산’이 오면 공관 차석(DCM·Deputy Chief of Mission)에 유능한 외교관을 기용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외교관이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입니다. 유 전 장관은 북미국장을 마치고 1998년 워싱턴 DC에 정무공사로 부임했습니다. 2000년 7월 그가 2년 넘게 정무공사로 근무,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교수 출신의 Y 의원이 주미 대사로 임명됐습니다. Y씨는 미국 대학 교수 경험도 있지만,한미 관계를 최일선에서 담당하기에는 ‘약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정빈 외교부 장관은 “Y 대사가 자리 잡을 때까지 유 공사가 잘 보좌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공사는 이 장관이 교체된 후인 2001년 9월, 3년 반 만에야 한승수 외교부 장관 특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유엔대표부는 대사 1인, 차석 대사 2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최근 조현우 차석 대사가 대통령실의 안보전략 비서관으로 귀국, 김상진 차석 대사가 대사 대리로 근무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조현장관은 대통령실 근무 경험이 있는 홍지표 북미국장, 이주일 중남미국장 등 역량 있는 외교관 중에서 신속하게 차석 대사를 충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