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불법 체류 혐의 등으로 집단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미 간 긴급 교섭을 통해 12일 전세기를 통해 귀국했으나, 쇠사슬에 묶여 집단 구금된 장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단기 상용 비자나 비자 면제 프로그램으로 입국했지만, 현지에서 취업과 유사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외교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재입국에 불이익이 없다는 확약을 받고 귀국을 지원했습니다. 이번 사태는 한미 관계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유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비자 워킹 그룹’ 신설 논의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미 관계 중대 현안이었던 비자 문제
200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 비자 문제는 한미 관계의 중요한 현안이었습니다. 2008년 11월 한국이 미국의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관광이나 회의·세미나 참석, 계약 협상 등의 상용 목적으로도 반드시 대사관 면담과 비자 발급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는 매일같이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미국 비자를 최종적으로 손에 쥐기까지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리면서 한국 내에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주한미국대사관은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 대사가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 USA’에 영사·비자 전용 게시판을 개설, 마이클 커비 총영사가 직접 네티즌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1월로 기억합니다. 미국 대사관은 비자 발급에 대한 한국인들의 원성이 커 가자, 외교부 출입 기자들을 초청해 영사부를 견학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상당히 큰 키의 제프리 튜니스 부총영사는 미 대사관 1층과 2층을 오가며, 미국 직원과 45명의 한국인 직원이 비좁은 공간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이 비자를 받으려고 대기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하루에 약 2000명을 처리해야 하나, 대사관 건물이 협소해서 최고 1500명밖에 처리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연간 42만 건의 비자 신청을 처리해야 하지만 건물 사정으로 35만 건밖에 수용하지 못한다고 한 겁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의 희망은 대사관을 신축하는 것으로 “새 대사관 건물이 완공되면 더 많은 비자 신청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인 여성의 미국 내 매춘 거론한 미 총영사
미국 대사관은 비자 처리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한국의 비자면제국 가입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버나드 알터 총영사는 한국인의 비자 거부율이 5% 안팎으로, 비자면제국 기준인 3% 이하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한국이 비자 면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도 거론되었습니다. 커비 총영사는 한국인 여성의 매춘 사례가 발견되는 것은 비자 면제 논의에 심리적·정신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매춘 여성을 적발할 때마다 한국인이 발견되면, 한국을 미국의 국경 개방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 비자 신청 비용은 2007년 1월 1일부터 131달러로 인상됐는데, 한국 언론이 이를 주요 뉴스로 다룰 만큼 비자 문제는 한국 사회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부시, 한미 FTA 서명일에 비자 면제 언급
미국 비자 면제가 가시화된 것은 제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인 2007년 6월입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양국이 한미 FTA에 서명하던 6월 30일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의 여행 비자 면제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는 한국만을 위한 조치는 아니었지만, FTA 서명과 동시에 한국을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2월 퇴임하기 전, 자신의 임기 내 미국의 비자 면제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는 “비자 면제에 대해 양국 간 논의가 상당히 진행돼 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의 이번 의지 표명으로 더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또 “앞으로 한국의 전문 직종 종사자의 경우, 별도의 전문직 비자 쿼터를 받아내는 방안을 미국과 논의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FTA 협정 서명으로 통상 정책에 대한 양국 정부 간 신뢰도가 높아진 상황을 활용, 우리나라 전문직의 미국 진출을 용이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한 겁니다.
실제로 호주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후, 10개월 만에 E비자를 만들어 연간 1만500개의 전문직 비자쿼터를 확보했었습니다. 김 대표는 “미국과 논의 중인 전문직 대표 직종은 건축사·기술사·간호사의 3개 직종으로, 호주보다는 더 많은 전문직 비자쿼터를 받아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만 개 이상의 전문직 취업 비자를 확보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나 한미 간 전문직 비자 신설 논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나와 진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관광·상용 비자 면제국이 된 후에 미국 취업 비자 등과 관련한 노력을 등한시한 것이 최근 미 조지아주 ‘쇠사슬 체포’ 사건의 빌미를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 대통령, 비자 면제국 기대했으나...
2007년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미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로, 주한 미군 감축, 기지 이전,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등 갈등을 겪던 양국이 협력 기조로 돌아섰습니다. 6월 3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FTA 서명식에는 양국 정·재계 인사들이 참석해 “동맹 강화”를 강조했습니다. 부시 대통령도 이때 한국의 비자 면제 가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당시 워싱턴 DC를 방문했던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에게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송 장관은 “한·미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가 나쁘냐고 반문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며 활짝 웃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냉정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에 꼭 미국 비자 면제국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2007년 당시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미국 정부 관계자와 식사를 함께한 후,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비자 면제국 얘기가 나오자 그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우리가 비자 면제국 특혜를 왜 반미(노무현) 정부에 주겠느냐. 한국의 비자 면제국은 다음에 들어오는 차기 보수 정부에 선물로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송민순 장관은 부시 행정부의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합니다. 송 장관은 2007년 7월 21일 내외신 기자 브리핑에서 우리나라의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 가입 전망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렇게 답합니다. “가급적 조기에 하겠지만 내년 정도는 가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어렵고, 차기 정부에서도 가능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 겁니다.
결국, 비자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화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되었습니다.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범죄 예방 및 대처 협력 협정’이 타결되며 마지막 걸림돌이 해소되었습니다. 이어 10월 부시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7국을 신규 비자 면제국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국민은 전자 여권과 ESTA 신청만으로 최대 90일간 비자 없이 미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매년 약 1000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예상되었고, 양국 간 인적·문화적 교류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미국의 비자 면제 프로그램은 단순한 행정 제도 개선을 넘어 정치적 의미를 갖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뤄지지 못한 제도가 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곧바로 성사된 것은, 한미 관계의 미묘한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조지아주의 ‘쇠사슬 체포’ 사건을 계기로 부각된 전문직 및 취업 비자 문제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어떤 담판을 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