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현지 시각) 한미 정상회담 이후 외교·안보 수장들이 연일 한미 원자력 협정으로 금지·제한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문제에 진전이 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재처리·농축을 통해서 우리도 (원전) 연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왔다”며 “이번에 그런 방향으로 일단 협의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도 지난달 31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라늄 농축·재처리 측면에서 우리가 더 많은 여지를 갖는 쪽으로 협의하고 있다. 가급적 일본과 유사한 권한을 갖고자 한다”고 말했다.
원자력 발전 후 남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239를 추출하거나, 사용후핵연료에 1%쯤 들어 있는 우라늄-235를 3~5%로 농축하면 다시 원전 연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얻어진 플루토늄이나 20% 이상 고농축한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도 있어 재처리·농축은 국제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2015년 최종 개정된 한미 원자력 협정도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를 금지하고, 우라늄을 20% 미만 저농도로 농축할 때도 미국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다만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해 둔 국내 원전 26곳의 저장 시설이 5년 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세계 원전 5대 강국의 위상에 걸맞은 재처리·농축 권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여권 소식통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이 비공개 업무 오찬에서 이 문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기했을 때, 미국 측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미국의 정책 변화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당초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하는 협상 개시 선언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회담 이후에도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늘려 받으려면 협정을 다시 논의해야 할 텐데 우리보다는 미국 쪽 사정이 워낙 복잡하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은 지난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국도 일본처럼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가 가능한 방향으로 원자력 협정에 대한 개정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1988년 발효된 미·일 원자력 협정은 일본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20% 미만 저농도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미국 정부는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해 재처리·농축 권한을 가진 나라 숫자를 제한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쳐 왔다. 트럼프 대통령도 한미 정상회담 당시 기자들에게 중·러와 비핵화를 논의하고 싶다며 “핵무기가 확산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직 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 에너지부, 국무부, 국방부 등에는 여전히 한국에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을 허용해 줘서는 안 된다고 보는 인사가 많이 포진해 있다”며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하거나 한미 원자력 고위급 위원회를 열어 우라늄 농축에 합의하려면 이런 ‘비확산 스쿨’의 반대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면 트럼프 미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한국에 이를 허용해 주라는 ‘지시’를 하거나, 미국이 한국에 대해 다른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한 미군 태세 조정처럼 여전히 한미가 협상 중인 다른 안보 현안과 이 문제가 연계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위 실장도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에 대해 “모든 게 연동돼 있는 이슈로 다른 이슈와 연동돼서 하나의 합의를 이룰 수도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을 하는 미국·러시아·프랑스·중국·인도 등의 국가는 대부분 핵무기를 갖고 있다. 미국이 1980년대 핵보유국이 아닌 일본에 재처리·농축을 허용한 것이 이례적인 일로, 중·러 견제를 염두에 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미 원자력 고위급 위원회를 재가동하는 등 실질적 논의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양국 원자력 협력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기구로 2016년 첫 회의를 열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등으로 2018년 이후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