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부가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한국의 핵작전 지원을 구체화하기 위한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를 오는 10월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구체 일정을 막바지 조율 중인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지난 1월 마지막 회의 이후 약 9개월 만으로, 예정대로 협의가 이뤄지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첫 핵협의그룹 회의가 된다.
안보 소식통은 이날 본지에 “최근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핵협의그룹 협의를 이어나가자’는 연락이 있었다”라며 “바이든 정부 시절 만들어진 협의체인 만큼 트럼프 정부가 이어나갈지 우려가 있었는데 미국도 그 필요성에 동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국가안보실의 지휘하에 국방부, 합참, 외교부 등이 회의 개최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핵협의그룹은 2023년 4월 국빈 방미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조 바이든 당시 미 대통령과 합의해 발표한 ‘워싱턴 선언’의 일환으로 창설됐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로 ‘북핵이 미 본토를 위협해도 미국이 한국을 방어할 것인가’란 의문이 제기되자, 북핵 유사시 미국의 핵 대응 계획을 한국에 공유할 협의체를 만든 것이다. 핵협의그룹은 한미가 유사시 대응 방안을 공동 기획하고 한미 연합 연습 등을 통해 공동 실행을 준비하는 창구도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의 실전 대응 능력을 키우는 효과도 있다.
다만 미군의 해외 개입에 부정적인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나 한미 연합 훈련이 연계된 한미 핵협의그룹 회의를 중단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이 회의가 계속되면 이런 우려가 해소되면서 미국의 확장 억제 공약의 신뢰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北 핵공격 가정한 한미 도상연습, 올해 안에 첫 실시
한미 국방부 차관보급 당국자가 주관하는 한미 핵협의그룹 회의 결과는 매년 10~11월쯤 양국 국방부 장관이 모여 개최하는 한미 안보 협의 회의(SCM)에 보고하도록 돼있다. 한미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올해 SCM 이전으로 이번 회의 일자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퇴임 열흘 전인 지난 1월 10일 워싱턴DC에서 4차 회의가 개최된 만큼, 이번 5차 회의는 서울에서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5차 회의와 동시, 혹은 그 직후에 양국 국방당국이 북핵 위기를 상정해 실시하는 도상연습(TTX·Table Top Exercise)이 있을지도 주목된다. 정부는 한미 핵협의그룹의 첫 도상연습을 연내 개최하기 위해 미국 측과의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국방당국은 지난해 12월 4~5일 미국에서 핵협의그룹의 첫 도상연습을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그 직전에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하면서 무산됐다.
한미 관계에 밝은 소식통은 “양국이 이런 연습을 통해 10여 개의 북한의 핵 사용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대응 방안을 ‘공동지침’ 형식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고 전했다. 예컨대 북한의 특정 핵 위협에 대해 미국이 핵잠수함·대륙간탄도미사일·전략폭격기 등을 이용해 보복하면, 우리 측도 현무 미사일 등 첨단 재래식 전력으로 지원하는 식의 지침이다. 국방부 차관을 지낸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은 어떤 동맹과도 전략핵무기와 관련한 작전계획은 세우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공동지침 형태로라도 북핵 억제를 위한 상호 협의 수준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한미 핵협의그룹의 동향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14일 담화에서 한미 핵협의그룹이 “핵 선제 타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남북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현 정부가 핵협의그룹 회의를 재개하려는 데 대해 군 소식통은 “북핵 억제력 강화 노력을 중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의 공약인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는 미국의 확장 억제 제공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 회의를 유지하려 한다는 관측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도 한미 핵협의그룹 회의에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핵무기의 사용 승인은 미국 대통령의 독점적 권한(sole authority)’이란 것이 전통적 미국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핵협의그룹 회의를 계속하기로 한 것은 중국·러시아에 대한 견제 효과를 고려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미 핵협의그룹은 1차 회의 후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고, 이후 2~4차 회의 때도 ”한반도와 역내(域內) 평화와 안정“을 거론했다.
특히 중국은 한미 핵협의그룹이 대중 견제를 위한 안보 협의체로 발전할 가능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한미 핵협의그룹 창설 논의 중이던 2023년 5월 일본도 참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중국 외교부는 “타국의 전략적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반발했다. 일본이 핵무기 사용에 민감한 국내 여론 등을 고려해 참여하지 않으면서, 한미일 차원의 핵협의그룹은 창설되지 않았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의 ‘집단 안보’를 강조하고 있어, 한·미·일 3자 핵협의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일은 지난달 27일 양국 외교·국방 협의체인 확장 억제 대화(EDD)에서 동아시아 유사시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시나리오로 도상연습을 진행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지난 4월 한·미·일 3국 안보회의 실무회의 때는 3국 간 북핵 대응 도상연습이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 미국이 한일과 함께 인도·태평양 지역 유사시 핵 사용 시나리오를 준비하려 할 가능성이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