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과 관련, 대통령실 김용범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협상 과정에서 당연히 양국 간에 고성이 오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장에서 거칠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김 실장은 “미국은 소고기 30개월 월령 제한을 두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3개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미국 소고기 수입 1위 국가가 대한민국이라고 (반박)했다”며 이 과정에서 고성이 오갔음을 시사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발언이 어느 정도의 수위에서 나왔는지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협상의 민감도가 높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전모가 외부에 공개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워싱턴 DC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이 2007년 한미 간 치열한 FTA 협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화록을 자신의 책에서 이례적으로 공개, 이번 협상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를 추정케 합니다.
이경렬 대사, 5월 출간한 책에서 비사 공개
지난 5월 이경렬 전 주앙골라 대사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외교부 비판서 ‘명품 외교의 길’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대선 정국에 출간된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 파문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5/05/18/UEZP6SRJKFBNNHFOEH2VHSDFHQ/)
이 책에는 2007년 서울에서 한미 FTA 막바지 협상 중, 백악관에서 W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과 L 주미대사와 벌어진 ‘설전’이 약 20여 페이지에 걸쳐 ‘버베이텀(verbatim·축약 없이 원문 그대로 적음)' 형태로 실려 있습니다. W 보좌관의 수 차례 폭언도 그대로 기록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외교부를 출입하며 숱한 문서를 봐왔지만, 백악관에서 벌어진 한미 고위 관계자의 대화록이 낱낱이 기록된 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한미 협상 중에 있었던 일이 에피소드 형태로 일부가 소개된 적은 있었지만, 대화록 자체가 통째로 책을 통해 공개된 것은 이례적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이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미국 숭배”를 한다는 이 책의 취지와 주장엔 동의하지 않으나, 2007년 백악관에서 벌어진 외교 비사는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대화록을 검증해 당시의 상황을 전합니다.
맥코믹 경제부보좌관 대신 면담한 W 보좌관
2007년 3월 30일 당시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미 FTA 관련 마지막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명품 외교의 길’ 저자 이경렬씨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 의해 주베트남대사관에서 주미대사관의 경제 참사관으로 부임, L 대사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L 대사는 이날 한미 FTA 문제로 존 맥코믹 대통령 경제부보좌관과의 면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배석자로 이 참사관이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맥코믹 부보좌관의 동향이 수상했습니다. 전화 회의를 하고 있다며 백악관 내에 있는데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W 보좌관을 대신 만나게 됐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참사관이 작성한 대화록에 따르면, 한미 FTA 타결 시한을 48시간 앞둔 시점에서 L 대사와 W 보좌관은 쌀·자동차·북한 문제를 두고 충돌했습니다.
W 보좌관은 “양측이 매우 근접해 있으나 한국의 농림부 장관이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쌀이 포함돼야 의회를 설득할 수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그는 “한국이 미국에 연간 70만 대 자동차를 팔면서 미국은 4000대 수출에 그친다”며 언성을 높이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줬는데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느냐.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노 딜(FTA 무산)’”이라고 경고했습니다.
L대사는 “쌀은 한국에서 초민감 품목이다. 농림부 장관도 어려운 입장”이라고 반박하자 W보좌관은 “그러면 그를 해임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W 보좌관은 또 “한국은 소고기 문제로도 장난질을 하고 있다. 대사도 여기서 미국 소고기 먹지 않느냐“며 L 대사 얼굴에 손가락을 들이댔습니다. L 대사는 침착한 어조로 “말이 너무 심하다. 이런 면담은 34년 외교관 생활 중 처음”이라고 항의했습니다.
L 대사는 “자동차 분야에서 미국의 제안은 형평에 어긋난다. 한국은 즉시 관세 철폐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트럭 관세를 10년간 유지하려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W 보좌관은 “외국차 점유율이 4%인 나라가 무슨 FTA냐”고 했습니다.
급기야 W보좌관은 벽에 걸린 북한의 여성 투사 초상화를 가리키며 고함을 치면서 폭언을 했습니다. “이제 한국은 영영 중국의 손아귀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미국이 한국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지금 저 여자 후손이 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L 대사가 “말이 지나치다”고 했지만, 그는 다시 “한국은 친구가 누구인지 모른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전쟁을 제일 많이 하는 나라라고 말하는 외교 장관이 있는 정부가 문제”라고도 했습니다.
W보좌관은 “1960년대 1인당 소득 100 불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미국이 구해 주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감사해야 하지 않나. 한국이 어떻게 감히 미국을 적처럼 대하면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마터면 000 000 뻔했다”
이날 배석했던 이경렬 참사관은 “나는 두 사람의 설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참사관은 격하고 비(非)외교적인 표현으로 W보좌관을 비판했습니다. “W보좌관이 북한 여성 투사 초상화를 가리키며 미국이 한국인을 구해주지 않았으면 저 (북한) 여자 후손들이 다 되었을 거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하마터면 OO0 000 뻔했다. 주변에 000 000 00가 있었다면, 그대로 000 0000 00내고 싶었다”고도 했습니다.
이 참사관은 이 책에서 L대사에 대해 “한국 외교부에서 보기 드문 실력자 중 한 분. 나는 업무적으로 그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내심 존경했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과 언어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미국이라고 마냥 저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그가 당시 무례하게 나오는 W보좌관 앞에서 “한국 외교관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L 대사와 함께 대사관으로 돌아온 그는 면담 내용을 정리해 대화록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먼저 한미 FTA 협상 참석차 서울 출장 중이던 최석영 경제 공사에게 보고했습니다. 최 공사는 “그 친구 참으로 와일드한 놈이구만”이라고 답한 후, 이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부차관보에게 항의
위성락 정무공사(현 국가안보실장)는 L 대사의 지시에 따라 국무부의 캐슬린 스티븐스 아태담당 선임부차관보(나중에 주한 미대사)를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스티븐스 부차관보에게 대화 내용을 하나하나 들려줬습니다. 위 공사의 말을 경청하던 스티븐스는 위 공사에게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고 합니다. L 대사는 8일 전화 통화에서 “W보좌관이 서울에서의 FTA 협상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겁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데 이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가 이성을 잃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L 대사는 “국무부 고위 관계자가 나중에 W보좌관은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처럼 이성을 잃으면 자신의 발언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유감의 뜻을 전해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협상 상황을 잘 아는 전직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의 패스트 트랙이 종료되기 전에 의회에 보고를 하지 않으면 FTA가 끝나는 상황으로 양국 모두 배수진을 치고 하는 협상이었다. 그런데 미국 측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W보좌관이 화가 나서 감정적인 얘기를 쏟아내 문제가 됐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W보좌관은 L대사 앞으로 사과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백악관 레터헤드가 없는 백지에 짧게 타이핑된 이 편지에서 그는 “감정적 분출에 대해 개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L 대사가 한미 관계의 증진을 위해 기여한 점을 평가하는 문장도 덧붙였습니다. 백악관은 W 보좌관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 그를 질책하며 사과 편지를 발송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 두 달 뒤인 2007년 5월, 필자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습니다. L 대사, W 보좌관, 이경렬 참사관을 모두 만났지만, 당시 이같은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W보좌관은 현재 미국에서 조지 타운대에 적을 두고 활동하며 미중관계, 한반도 문제 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경렬 대사는 6일 전화 통화에서 2007년 백악관에서 있었던 일을 공개한 것에 대해 “W보좌관의 발언은 백악관 고위 관계자의 결례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과연 한국을 주권 국가로 보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문제였다”고 했습니다.
가끔씩 ‘반칙’ 범하는 미국
2007년 한미 FTA 협상 관련, 백악관에서 벌어진 일은 양국 간 협상이 얼마나 민감하고 치열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한미 양국은 1953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동맹이지만, 때로는 밀실에서 이렇게 충돌하고, 가끔씩 미국이 한국을 자극하는 ‘반칙’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2025년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한미 관세 협상. 대통령실 발표에 따르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말 카운터파트인 마코 루비오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의 웨스트윙을 약속된 시간에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루비오를 ‘긴급 호출’하는 바람에 그를 못 만나고, 유선 협의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트럼프의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는 위 실장이 찾아간 웨스트윙 내에 있습니다. 불과 1분 내에 부통령과 대통령 참모들이 모두 오벌 오피스에 모일 정도로 웨스트윙은 작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간 위 실장은 루비오의 얼굴도 못 보고 돌아왔습니다. 트럼프가 “한국에서 온 위 실장을 절대 만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에 루비오가 잠깐 시간을 내 악수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동맹국을 존중하지 않는 트럼프를 보면, 일부러 한국 대표단을 냉대하는 전략을 써서 협상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과거 미국의 대통령은 한미 관계가 아무리 좋지 않고,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이런 식의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지휘하는 과세 협상팀이 이번 한미 협상에서 2007년 W보좌관 식의 논리를 펼치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P.S.
조선닷컴에 매주 일요일 연재되는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가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책 제목은 ‘성공한 외교, 실패한 외교 – 이하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사진)‘ 로 박영사에서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는 지난해 4월 매주 연재를 시작한 후, ’DJ와 정상회담 후 동생 출연한 열린 음악회 달려간 클린턴 대통령’ 등 총 41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