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6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세계정치학회가 진행된 가운데 우원식 국회의장을 포함한 내빈과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경식 기자

전 세계 정치학자 3000여 명이 참여한 세계정치학회(IPSA) 서울 총회가 16일 폐막했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권위주의화에 맞서기(Resisting Autocratization in Polarized Societies)’를 주제로 13일부터 4일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이번 총회는 권위주의 통치의 확산, 민주주의 제도 침식, 가짜 정보의 범람 등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집중 논의했다. 1997년 이후 28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열린 이번 총회에는 미국, 유럽, 아시아 등에서 70여 국 학자들이 참석, 800개 이상의 세션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한국계 미국 정치학회장 전체 세션 발표

이태구 미국 정치학회 회장

16일 서울 총회 마지막 날 가장 주목받은 학자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한 전체 세션에서 발표한 이태구 미국 정치학회 회장(하버드대 교수)이다. 한국계인 이 교수는 ‘민주주의 붕괴와 포퓰리즘 딜레마’를 주제로 미국의 트럼프 현상을 분석했다. 그는 “트럼프 2기 시작 후, 미국은 민주주의가 위협받거나 위기냐고 묻는 단계를 지나버렸다”며 “미국은 이미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제한되거나 왜곡되는) 경쟁적 권위주의 체제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통치 양상은 삼권 분립 파괴, 시민권 침해, 반대자에 대한 권력 동원의 정당화 등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통치 징후”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배경으로 여섯 가지 변화를 지목했다. △인구학적 변화△경제적 변화△이 두 변화의 결합으로 인한 극우적인 소수 백인 집단 사이의 ‘반동적 정치’ 고조△이념적 양극화에 따른 정치적 변화△사회 전반의 제도·조직에 대한 신뢰 붕괴△기술 혁신에 따른 정보 환경 왜곡 등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미국 민주주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정보 환경은 잘못된 정보, 허위 정보, 악의적 정보가 즉각 범람하는 시대”라며 “이러한 환경에서는 유권자들이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언론, 학계, 과학계, 사법부와 같은 민주주의 인식 기관(epistemic institutions) 자체가 공격받고 붕괴된다”고 했다.

포퓰리즘은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치환하며, ‘전문가 대 대중’ 구도를 만들어 민주주의적 숙의(熟議) 공간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향후 전망에 대해 그는 네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째, 2026년 중간선거나 2028년 대선을 기점으로 반전 계기가 생길 수 있다고 봤다. 둘째, 누가, 어떤 의도로 저항 운동을 이끄느냐에 따라 민주주의 평형 상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셋째, 현 체제가 지속되며 실질적 경쟁이 사라지고 일당 독재로 전환할 가능성이다. 마지막은 ‘좋은 포퓰리즘’의 등장을 통한 반전이다. 이는 민주주의 옹호 세력이 포퓰리즘적 감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구조적 문제 해결에 나서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한국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대한 시민 저항 운동을 넷째 범주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부정선거, 법적 독재 등도 논의

이번 총회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부정선거 의혹, 가짜 뉴스, 선거 관리 기구에 대한 불신 등이 주요 토론 주제로 부각됐다.

15일 ‘선거관리와 제도의 개혁’ 세션에서 선거 전문가인 데이비드 패럴 전 유럽정치학회장은 “이전에는 선거와 관련된 제도의 문제로 부정선거 의혹이 많이 나왔다면, 지금은 제도는 큰 문제가 없는데 실제 선거 관리와 유권자의 인식 간의 괴리가 큰 문제”라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관위와 선거 제도 자체는 더 이상 개선할 것이 크게 없는데,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있다는 유권자의 인식이 논란을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공론(公論) 조사처럼 선거 관리의 신뢰 회복을 위한 공론 조사 도입을 제안했다. 중앙대 박범섭 교수는 “한국의 선거 제도는 ‘승자 독식’인데, 이는 다른 말로 ‘루저 루즈 에브리싱’ ”이라며 “선거 불신을 줄이기 위해서는 승자 독식의 선거 제도를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정당 개혁, 개헌 등의 제도 개선 필요성도 제기됐지만, 시민들이 민주주의 퇴행과 권위주의를 용인하는 데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인도의 정치학자 니라 찬도크 전 델리대 교수는 선거·정당·의회 등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하지만, 입법을 통해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법적 독재(legal autocracy)’ 문제를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정치학회 서울총회 조직위원장인 김의영 서울대 교수는 “지금 전 세계가 앓고 있는 권위주의의 대두와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전 세계 정치학자들이 모여서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했다”고 평가했다.

☞경쟁적 권위주의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토론토대 루칸 웨이 교수가 이론화한 개념이다. 선거, 의회, 언론 등 민주적인 제도가 표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집권 세력의 언론 통제, 사법 조작, 선거 조작 등으로 민주주의가 사실상 제한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공정한 경쟁’은 사라지며,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 위태로워진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