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오는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이재명 대통령을 초청, ‘전승절 외교’에 대한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이 언제 이뤄질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대통령실은 “참석 여부와 관련해 중국과 소통 중”이라고 밝혀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소통 중’이라고 한 것이 ‘참석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중앙 일간지들이 일제히 전승절 참석에 신중해야 한다는 사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최근 한 매체가 전승절 참석 문제를 제기했을 때만 해도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도 불구, 2014년 이후 방한하지 않은 시진핑 주석이 경주 APEC 회의 계기로 한국에 먼저 와야 한다”는 논리로 이 문제를 비켜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위 실장이 박 대통령의 2015년 중국 전승절 참석을 비판한 적도 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이재명 정부 초반에 외교 스텝이 꼬일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이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 여부는 향후 한중 관계는 물론 한미 관계, 동북아 상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10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기하는 일이 필요해 보입니다.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기념식 참석 후, 한중 관계는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통일 대박’에 중국의 지지 희망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참관한 대통령으로 기록됐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과 함께 톈안먼 성루에 올라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본 장면은 세계 주요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 등 주요 서방국 정상들은 모두 불참했기에 박 대통령의 참석은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주요 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정당화했습니다.
첫째, 한중 관계 강화였습니다. 항일전쟁은 한반도의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기에 이를 기리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자연스러운 행보이며 중국과의 거리를 더욱 좁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 직전에 북한은 DMZ에서 목함지뢰 도발을 감행했고, 우리 군은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실질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에 전승절 참석이 안보 측면에서도 의미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전승절 참석을 계기로 중국과 통일 논의를 시작하기로 합의한 것을 큰 성과로 평가했습니다.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은 전승절 기념식 전날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이례적으로 통일과 관련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이 “한반도가 분단 70주년을 맞아 조속히 평화롭게 통일되는 것이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고 하자 시 주석은 “한반도가 장래에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한 것입니다. 중국은 그동안 남북한 통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 왔는데, 우리 정부 입장을 배려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임기 중 ‘통일 대박’론을 발표하며 통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는데,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을 사전에 베이징에 보내 통일에 대한 시 주석의 언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의 불편한 시선, 한미일 협력 균열 우려
우리 정부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박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은 국내외에서 예상보다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한일 간 위안부 문제 등으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한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과 나란히 열병식을 지켜보는 모습이 한미일 안보 협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저는 2015년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 직후에 워싱턴 DC를 방문, 미 국무부의 주요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만남에서 그는 이처럼 미국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에 대해선 미국에서 ‘문제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동맹국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느냐’며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에둘러서 미 행정부 내에 박 대통령의 결정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크다는 것을 내비친 것입니다.
북핵 위기에 시 주석은 ‘무응답’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으로 한중 관계는 한층 강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4개월 뒤 예상치 못한 사태가 닥쳤습니다. 2016년 1월 6일, 북한은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수소폭탄 실험 성공’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놀란 박 대통령은 대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즉각 시 주석과의 긴급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시 주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정이 많아 응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전화 통화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주변 참모들에게 배신감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온갖 논란에도 시 주석과 함께 톈안먼 성루에 오르는 정성을 보였지만, 정작 시 주석이 위기 상황에서 손을 잡아주지 않은 데 대해 화가 난 겁니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여러 논란을 무릅쓰고 베이징에 가서 열병식에 참석했는데 중국이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힘들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
박 대통령은 2016년 1월 13일 북핵 대응 담화문에서 이례적으로 중국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핵 불용 의지를 수차례 천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추가 핵실험도 막을 수 없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도 불가능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입니다.”
시 주석에 대한 실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비판한 겁니다. 박 대통령이 “힘들 때 손을 잡아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지만, 시 주석과의 통화는 북핵 실험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성사됐습니다. 중국은 유엔의 대북 제재에 대해서 찬성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시 주석은 북한의 핵 실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중북 간 전통적인 관계를 고려해 박 대통령과의 통화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기 부담스러워 피해버렸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의 시 주석에 대한 기대가 다소 과도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동맹국의 파트너도 아닌데 2013년 취임 후, 시 주석을 매년 만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지나치게 높이 보고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는 겁니다.
사드 배치와 한중 관계 냉각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일을 겪은 후, 한중 관계 보다는 한미 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외교 노선을 전환합니다. 2016년 7월 8일,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이 결정은 중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한한령(한류 금지), 관광 제한, 롯데 계열사 철수 압박 등 실질적 경제 보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타협은 없다”고 선언하며 사드 배치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2016년 7월 사드 배치는 오바마 정부가 주한미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요청해왔기에 한중 관계가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사드는 당시 한미 관계의 주요 사안으로 우리가 계속 배치를 지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박 대통령과 시 주석과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더라도 실행될 수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 1월 북핵 위기때 박 대통령과 시 주석 간의 통화가 성사되며 좋은 관계가 이어졌다면, 중국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배치 시기 조정 등 사태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2015년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외교’였지만, 해 볼 만했다는 평가도 제기됐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미중 간 전략 경쟁이 지금처럼 첨예하지 않았으며,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중관계 개선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대다수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노골화된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다면 그것이 야기할 외교적 파장은 과거보다 훨씬 클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미국을 ‘점령군’으로 비하한 전력, 그리고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 저자세 외교 등으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 내 일각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인식 외에도, 중국이 연출한 무대에 ‘조연 배우’로 오르는 것과 한국의 위기 상황에서 손을 맞잡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교훈을 대통령실이 10년 전 전승절 논란에서 배워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