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 계엄과 탄핵으로 다음 달 3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가운데 외교부 안팎에서 한 권의 책 때문에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명품 외교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외교부에서 33년간 근무했던 전직 대사가 쓴 책인데, 이에 대한 서평이 외교부 직원들만 볼 수 있는 외교부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이 책엔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과격하거나 파격적인 주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창천이라는 필명(筆名)의 전직 외교관은 608페이지의 ‘벽돌 책’에서 외교부를 외무부로 일컬으며 “외무부는 없어 버려야 한다. 지난 77년 동안 한국의 외무부로 행세하면서 덕지덕지 켜켜이 때가 찌든 이 조직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면적으로만 더럽다면 고압 세척이면 그럭저럭 세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깊이 썩었다면 고압 세척이 아니라 국부 절제로도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다리 한쪽을 통째로 절단해야 한다. 필요하면 두 다리 다 자를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대사님은 함량제로입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외교관들의 절대 다수가, 특히 선배 세대들의 경우에 더더욱, 수치화하자면 아마도 95% 이상이 함량 미달이거나 함량 제로라는 것을 발견했다. 대상자 면전에서 그렇게 말한 경우도 있었다.” “인간 품질이 이토록 형편없이 낙후된 것은 외무부가 조직 관리를 잘못한 결과”라며 “조직 관리라는 것이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C국(저자의 책 표기. 알파벳 C로 시작하는 나라는 아님)에서 일할 때를 사례로 들었습니다. C국에 부임한 허명환 대사(저자가 책에 쓴 가명)가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C국 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됐습니다. 허 대사는 토킹 포인트를 세심하게 준비했습니다. C국의 전문가를 대동하고 가서 외교부 장관을 만나 준비한 토킹 포인트를 언급하고 있을 때 외교부 장관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습니다.
최근 남북한 관계를 설명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C국은 남북한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질만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준비해 오지 않은 질문을 받은 대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습니다. 그냥 장관의 질문을 무시한 채 다음 토킹 포인트로 넘어갔습니다. 이에 C국 장관이 대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조금 전에 한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습니다. 대사의 표정은 사색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대사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준비해 온 토킹 포인트를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는 더욱 더듬거렸고, 목소리는 작아졌습니다. 허 대사의 시선이 메모지에 꽂혀 있을 때 C국 장관이 두 팔을 벌려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 내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허 대사는 자신이 해 온 토킹 포인트를 모두 말한 후에야 발언을 멈췄습니다.
그 후 허 대사와 6개월을 지낸 저자는 허 대사를 면전에서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부임하기 전에) 전 공관에 대사로 계실 때 같이 있던 직원들이 그러더군요. 대사님은 함량 미달이라고. 그런데 제가 볼 때 그 친구들 말이 완전히 틀렸어요. 제가 볼 때 대사님은 함량제로입니다.” 그는 “상대가 남북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정도라면 외교관 당장 그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외교관이라면 그런 것은 항상 업데이트를 해가며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사항”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허명환 대사가 C국 외교장관을 만나고 나서 본부로 보낸 보고서도 제법 그럴듯한 것이었다”며 외교부 직원의 보고서는 새빨간 거짓말은 없지만, 그 이외의 거짓말은 다채롭게 녹아 있다고 했습니다. “(외교관의 보고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외교 활동을 아주 잘했다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대사한테 잘했다는 좋은 소리를 들어 나중에 인사에 플러스 요인을 만드는 일이지 사물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미국 숭배가 문제”
이 전 대사는 자신의 책에서 “나는 미국을 하느님처럼 숭상하는 외무부의 분위기를 너무도 싫어했다. 외무부는 모든 일이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끝나는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 대외 정책의 핵심은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일관된 지조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며 “그 핵심은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미국 숭배”라고 비판했습니다. “정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며 ”2024년 말까지 윤석열 정부는 숭미를 더욱 견고한 모습으로 굳혀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외교관들이 외교 활동을 빙자해 예산을 유용한다고 비판하며 미국에 굴종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워싱턴에 부임해 보니까 거기서도 한국 외교관이 미국인 식사를 시중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애걸복걸해 겨우 한번 윤허를 받으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밥상을 올리는 모습들이었다. 밥을 사 주면서 한마디 얻어들어 근사하게 꾸민 보고서를 대사한테 보여주면 그래 너 참 잘한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마무리하며 “자기가 몸을 담았던 사회와 조직의 진정한 변신을 뼈저리게 염원하는 자가 시린 마음으로 내뱉는 자학적인 외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의 서술을 불쾌하게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나의 비판은 외무부라는 조직과 한국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며 “외무부라는 조직이 그런 (잘못된) 인물을 낳았던 것이 나의 주안점이고, 잘못된 나라가 그런 외무부를 만들었다는 것이 나의 초점”이라고 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으로 발탁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집필한 이는 이경렬 전 앙골라 대사입니다. 서울의 우신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 후, 1985년 외시 19회로 외교관이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 바르샤바, 루안다’에서 활동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지켜본 그는 외교부 주류가 보기엔 이단아였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강하고, 선배들에게 과감하게 할 말을 하는 스타일인데, 실력없는 상사들은 통솔하기 어려운 외교관이었습니다. 자신의 성향에 대해선 “(외교관 생활 하면서) 좌파로 은연중에 지탄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외교부는 크게 정무와 통상 두 분야로 나뉘는데 통상 분야에서는 외시 13기의 L씨, 외시 21회의 Y씨와 함께 ‘3대 걸물’ 또는 ‘3대 괴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평소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는데, 이 때문에 미국과 어려운 협상을 할 때 두 차례 중용됐습니다.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협상, 한미 FTA 체결 협상을 할 때입니다. 한미 FTA 협상 중일 때는 현재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통상 책사’로 외교안보보좌관을 맡고 있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에 의해 발탁돼 워싱턴 DC의 주미한국대사관에 배치됐습니다. 그는 당시 일화를 책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2005년) 나를 워싱턴으로 보낸 사람이 통상교섭조정관 오종현(저자가 책에서 김현종씨를 오종현이라는 가명으로 썼음)가명)이었다. 2005년 5월 어느 날 아침 나는 하노이 한국대사관 내 사무실에서 오종현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먼저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묻더니 난데없이 워싱턴 대사관에서 참사관 한 사람이 귀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오종현이 뭐 생각 키워지는 것이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당신이 그 후임으로 워싱턴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드냐는 것이었다. 나는 하노이에 온 지 1년 반밖에 안 됐는데 여기가 너무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종현은 베트남에서 1년 반 놀았으면 되지 않았냐면서 약간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어느 임지에서건 1년 반 놀고 1년 반 일하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그랬더니 전화가 갑자기 뚝하고 끊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오종현은 다짜고짜 명령이니 워싱턴으로 가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졸지에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하노이에서 워싱턴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나는 마지못해 워싱턴으로 끌려간 전무후무한 외무부 직원이 되었다. 다들 서로 가겠다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워싱턴 대사관이라는 곳을 나는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할 수 없이 간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렇듯 김현종 보좌관과 이 전 대사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는 김현종씨가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워싱턴에 출장 올때마다 그의 보좌관이 되다시피 했다”고 썼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셰넌도어 공원으로 하이킹을 가는 것을 좋아했다. 협상이라는 전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중략) 오종현 본부장은 내가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는 내가 미국 의회 보좌관들하고 말할 때 주눅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상대들을 꼬리 내리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 좀 살살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으 들으며 나는 그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김현종씨는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일하면서 그를 차관보급인 외교부 경제조정관으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전 대사가 자신의 책에서 밝힌 대로 주우간다 대사를 할 때 국정원 파견관과의 갈등 등으로 국정원에서 반대 의견을 내 기용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전 대사는 부인하지만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고, 김현종씨가 국가안보실장이나 외교부 장관을 맡을 경우, 이 전 대사가 요직에 전격 기용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정권 교체기에 이런 책을 낸 의도가 의심된다"
전현직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이 전 대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가 압도적입니다. 외교부 비판은 수용할 수 있지만, 입에 담기도 어려운 거친 표현들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이가 많습니다. 외교부의 한 간부는 “이 전 대사는 외교부에 있을 때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선후배들로부터 신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며 “정권 교체기에 이런 책을 낸 의도가 의심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간부는 “이 전 대사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한 외교관은 “외교부의 문제는 대부분 이경렬 대사를 포함한 선배 세대 외교관들이 일으킨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온갖 혜택을 누리고 나간 후, 후배 외교관들을 향해 총질하느냐”고 분노했다.
한미 원자력 협정 당시 해외에 근무 중이던 그를 불러들여 관련 업무를 맡긴 전직 대사는 “1년 반 전에 이 대사가 쓴 초고를 내게 보여주었다. 외교부를 개혁해야 한다는 취지는 일부 공감하지만, 너무 많이 나갔다. 출간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끝내 책을 내버렸다”고 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다른 전직 대사는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과를 내는 사람으로 그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2년 전에 쓴 책, 신정부에 참여 안 한다”
지난 14일, 15일에 걸쳐 두 차례 이 전 대사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이 전 대사는 “자신의 책이 대선 정국에서 출간됐다는 점에서 이재명 캠프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나 차기 정부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 한국이 한미 동맹이라는 칼(죄수의 목에 씌우는 징벌 도구)을 스스로 쓰고, 미국을 숭상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나친 비약 아닌가.
“한미 동맹은 일종의 수단인데, 이게 한국 외교부의 지상 목표가 돼 버렸다. 한국의 독자적인 (주권) 영역을 제한하고 있다. 이는 윤석열 정부뿐만 아니라 이전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 외교부의 개혁을 비판하는 의도였다고 하나 표현이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미국 업무와 관련된 동료 선배 후배들이 하는 일을 보면서 지난 70년 동안 정신이 썩고, 행동 방식 자체가 찌질하고 용렬하며 퇴보해 왔다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이런 조직은 해체시켜 버리고 다시 짜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 대선 정국에 책을 출간했는데
“나는 6월에 신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원고를 썼다. 이미 2년 전에 원고를 모두 썼는데, 출판을 하겠다는 곳이 없어서 늦어졌다. 차기 정부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
-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모두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거짓말이라는 게 여러 가지가 있다. 아주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자면 100% 자기가 잘했다는 거짓말이다.”
- 상당수 외교관들은 이 대사의 책에 대한 비판적인데
“가까운 외교관 선배가 출간 전 원고를 읽고서 그 취지는 공감하나 이렇게 나가버리면 외교부를 공격하는 사람들한테 탄약을 주는 결과가 되지 않겠냐고 만류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고 믿고 하는 바를 솔직하게 쓴 것이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