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얼마 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리처드 아미티지가 사망하자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조야(朝野)에서 그를 애도하는 분위기가 일었습니다. 아미티지는 미국 내 공화당 원로이자 초당파 정책 조율자로 “누구보다도 일본과 미일 동맹을 사랑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본 정치인들과 언론은 미국의 대표적인 지일파(知日派)였던 그가 사망하자 “미일 동맹의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미사일 방어망 등을 협의하기 위해 한일 순방에 나선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이 2001년 5월 8일 일본 외무성 관계자의 영접을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시바 시게루 내각의 ‘넘버 투’ 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깊은 슬픔에 휩싸였다”며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하야시 장관은 아미티지가 미일 간 전략대화 촉진과 협력 강화 등을 통해 굳건한 동맹 구축에 크게 공헌했다고 했습니다. 미국 내 초당적 친일본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한 공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민당의 나카소네 히로후미 전 외무상도 당 회의에서 “일미 관계 구축에 진력한 고인을 기린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주요 언론은 “믿을 수 있는 지일파 중진을 잃었다”​고 애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아미티지가 미일 동맹이 흔들릴 때에도 일본 편에서 동맹을 지켜낸 인물이라고 평했고, 산케이신문은 그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과 동맹 강화에 앞장서 온 점을 부각하며 ‘미일 동맹의 버팀목’으로 평가했습니다. ​

일본의 최고 훈장 수여

일본은 아미티지의 미일 동맹에 대한 헌신에 대해 각별히 예우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아미티지에게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 중 하나인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수여, 미일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저는 워싱턴, 도쿄 특파원으로 현지에서 일할 때 아미티지가 미일관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과 한미동맹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적으로 뛰는 중량급 인사가 과연 있는가”라고 자문하곤 했습니다. 일본의 정치인들과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은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역대 총리들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아미티지와 면담을 가지면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2018년 도쿄에 부임하면서 일본의 주요 외교·안보 행사에는 늘 그의 자리가 준비돼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국제문제연구소(JIIA) 등이 주최하는 ‘후지산 회의’(Mt. Fuji Dialogue)와 같은 주요 전략 대화에는 아미티지가 항상 초청됐습니다. 그는 때로 기조 연설자나 의장 자격으로 참석,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를 지지하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런 국제 회의에서 아미티지는 “오늘날 일본처럼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적극 움직이는 나라는 드물다”며 일본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아미티지의 미일관계에 대한 헌신에는 일본 정부와 정치권, 언론, 전문가 그룹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던 겁니다.

24년에 걸쳐서 나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

아미티지는 미일동맹을 중시하며 일본의 역할 확대를 적극 지지해 왔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일본에 “Show the Flag(국제사회를 향해 미국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라)”고 요청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후 일본은 테러특별조치법을 제정, 자위대 함정을 인도양에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대테러 작전에 간접 지원을 했습니다.

2024년에 마지막으로 발간된 아미티지-나이 보고서 표지. 이 보고서는 2000년부터 24년에 걸쳐 7차례 발간, 미일동맹의 발전에 기여했다./CSIS

아미티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역사관에는 비판적이었으나 2012년 12월 2차 아베 정권 출범 후 그의 안보 관련 정책을 지지했습니다. 아미티지는 “이처럼 단기간에 많은 목표를 달성한 지도자는 드물다”며 방위비 증액,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등 그의 안보 정책 성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아미티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아미티지-나이 보고서(Armitage-Nye Reports)’로 알려진 정책 제안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그가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와 함께 미일 동맹의 미래 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민간 외교안보 보고서입니다. 2000년부터 2024년까지 총 6차례 발간됐는데, 각 보고서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미일 관계를 반영하여 다양한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미일 동맹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며 일본의 안보 역할 확대, 한미일 3국 협력 강화, 에너지 및 기술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5차 보고서에서는 북한 핵 위협에 대한 억제와 한미일 3국의 정보 및 방위 협력 강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일본은 아미티지-나이 보고서가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여러 측면에서 협조했습니다. 내각과 자민당, 대기업, 민간 싱크탱크는 아미티지, 나이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일본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아미티지-나이 보고서 발간 현황

- 1차 보고서 (2000년 10월)

제목: The United States and Japan: Advancing Toward a Mature Partnership 미일 동맹을 ‘성숙한 파트너십’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며 일본의 안보 역할 확대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 필요성을 강조

- 2차 보고서 (2007년 2월)

제목: The U.S.-Japan Alliance: Getting Asia Right through 2020 중국의 부상과 북한 핵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미사일 방어 및 정보 공유 확대를 권고

- 3차 보고서 (2012년 8월)

제목: The U.S.-Japan Alliance: Anchoring Stability in Asia미일 동맹을 아시아 안정의 핵심 축으로 삼고, 에너지 안보 및 경제 협력을 강화할 것을 제안

- 4차 보고서 (2018년 10월)

제목: More Important Than Ever 미일 동맹의 글로벌 역할 확대와 규범 기반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협력 강화를 강조

- 5차 보고서 (2020년 12월)

제목: The U.S.-Japan Alliance in 2020: An Equal Alliance with a Global Agenda 미일 동맹의 대등한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과 함께 북한 핵 위협에 대한 억제 및 한미일 3국 협력 강화 제안

- 6차 보고서 (2024년 4월)

제목: The U.S.-Japan Alliance in 2024: Toward an Integrated Alliance 경제 및 안보 분야에서 통합된 동맹 구축을 통해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 질서 유지를 목표로 제시

2007년 아미티지-나이 2차 보고서는 “2020년까지 남북통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잘못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핵 6자 회담에서 2005년 9·19 성명, 2007년 2·13 성명이 나와 장밋빛 전망이 확산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는 이런 오류가 있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미일동맹의 발전과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부러운 ‘작품’입니다. 한미 동맹은 올해 72주년을 맞았는데, 양국의 중량감 있는 인사들에 의해 동맹의 미래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제안서가 꾸준히 발간돼 양국 관계 강화에 기여하기를 희망해봅니다.

[P.S.]

1. “한국 민주화 발전 살피려고 방한했다”

아미티지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다가 1987년 주한미국공보원 공보실에서 나온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보 자격으로 방한해 9월 12일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질문과 답변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1987년 9월 주한미국공보원 공보실에서 만든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의 기자회견 관련 '배경설명'. 오른쪽 위에 작은 글씨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가 찍혀 있다.

당시 그가 모두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번에 방한한 나의 기본 임무는 지난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결의된 사항을 추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회의에서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한국이 1988년도 올림픽 게임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미국은 대한민국에 가능한 한 최대한의 전폭적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지도 모르는 몇 가지 군사적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에 왔습니다. 또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의 발전을 살피기 위해 방한했습니다.”

1987년은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해입니다. 이 선언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를 12월에 치르게 돼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방한한 미국의 국방부 차관보가 “한국의 민주화를 살펴보겠다”는 발언을 남긴 것이 눈에 띕니다. 이는 당시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아미티지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이 “귀하는 한국의 민주화를 살피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귀하는 한국의 민주화 현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였습니다. 이에 대한 아미티지의 답변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국방성에서의 나 자신의 직책은 대한민국 군부의 우리 동료들과 함께 방패를, 그 배후에서 그 같은 민주화가 이룩될 수 있는 방패를 제공하는 직책이다. 나는 이 민주화의 과정에 매우 강력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증거를 이곳 서울에서 보고서 기쁘게 생각했고, 또 방패를, 그 배후에서 이 과정이 진행될 수 있는 절대적 방패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이룩되고 있는 협력을 보고 기쁘게 생각한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도록 미국이 굳게 지원하겠다는 것이 요지로, 이듬해 열리는 88올림픽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2. 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 때 진사(陳謝) 사절로 방한

아미티지는 2002년 12월 10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한 진사 사절로도 방한했습니다. 당시 국무부 부장관이던 그는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 “부시 대통령은 한국민들에게 가장 깊은 사과(deepest apology)를 전해달라고 당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한 최근 한국민들의 시위에는 한국민의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다고 보며, 우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그래서 이번 방문을 통해 미국이 한국민을 존중하고 있다는 점이 다시 한번 충분히 전달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3. “한국은 장신들의 농구에 싫증 내고 있다”

아미티지는 2003년 2월 미 상원에 출석, “한국은 이제 미국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장신(長身)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농구하는 것에 싫증을 내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한국이 그만큼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것을 표현한 것인데, 그의 이 발언은 한동안 서울에서 회자됐습니다. 단신(短身)인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를 주제로 한 신문 칼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