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년 만의 재취임 첫날인 20일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부르며 미·북 정상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2018~2019년 싱가포르·하노이·판문점에서 모두 세 차례 만났는데, 수개월 내에 네 번째 만남을 갖고 북핵 협상을 재개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트럼프가 이날 언급한 ‘뉴클리어 파워’는 통상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과는 다르다. 북한을 법적으로 공식 핵보유국으로 인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트럼프가 피트 헤그세스 국방 장관 후보자의 ‘핵보유국’ 발언에 이어 취임하자마자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있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본지에 “트럼프가 취임 첫날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로 부르며 재협상을 시사한 것은 비핵화만 외쳤던 바이든 전 행정부와 차별화하겠다는 것”이라며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며 협상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했다.
외교 안보 전문가들도 비슷한 분석을 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트럼프가 ‘뉴클리어 파워’와 ‘뉴클리어 웨폰 스테이트’를 구분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그는 북한을 핵무기 제조를 완성한 국가로 인식할 것”이라고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그동안 주장해 온 북한 완전 비핵화가 사실상 비현실적이라는 시각이 미국 사회의 주류 입장이 됐다는 뜻”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트럼프가 군사·기술적으로 북이 핵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트럼프는 이날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치밀한 계산하에 북한과 관련한 발언을 해 김정은의 반응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이날 “나는 그를 좋아했고 매우 잘 지냈다. 그도 나의 귀환을 반길 것”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러브 콜’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는 주한미군과의 영상통화에서 김정은에 대해 ‘터프한 녀석(tough cookie)’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 실패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인다. 트럼프는 또 “그(김정은)가 해안가에 엄청난 콘도 역량(condo capabilities)을 보유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미·북 화해가 이뤄질 경우, 북한의 관광 자원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트럼프와 김정은의 3차 회동은 중요한 정상회담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이례적이었다. 2019년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트럼프가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는 뜻을 트위터에 밝히자 김정은이 즉각 화답, 다음 날인 6월 30일 만났다. 적대국 정상들이 만나는데, 회담 제안에서 만남까지 약 30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같은 전례를 보면, 미·북 양국이 물밑에서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김정은이 트럼프의 이날 발언에 즉각 반응하면, 언제든지 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트럼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이 당분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하에 언론의 관심을 북한으로 끌고 가려 할 수 있다”며 “결국 김정은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및 국회의 탄핵으로 정부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오고 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북 회담이 열려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2018년 제1차 싱가포르 미·북 회담 후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했으며 종국적으로는 주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성한 전 안보실장은 “트럼프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군축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입장이 패싱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양무진 교수는 “트럼프는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며 “트럼프의 미·북 대화 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뛰어야 한다고 했다”고 조언했다.
☞핵보유국, 핵무기 보유국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핵무기 제조 및 운용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한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을 공식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이라고 한다. 이후 자체 핵실험으로 사실상 핵무기 기술을 확보했다고 인정받는 나라들은 비공식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하며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이 있다.
☞터프 쿠키(tough cookie)
억세고 거칠면서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실패에 포기하지 않고 극복해내는 사람을 뜻하는 관용어. 격식 없이 쓰이는 말이다. 거칠다는 뜻의 ‘터프(tough)’와 ‘녀석’ 정도의 뉘앙스로 사용되는 ‘쿠키(cookie)’를 합친 말. 자신과 동년배거나 어린 대상에게 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