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잇따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비판하거나 경고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자칫 비상계엄 파문이 한미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 국무부의 커트 캠벨 부장관은 4일 워싱턴 DC의 아스펜 안보포럼(ASF)에 참석,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매우 문제 있고 위법한 행동으로, 예측할 수 없었다”며 “윤 대통령이 심하게 오판(badly misjudged)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국이 이런 조치를 관리하고, 명확하고 단호하게 반대하는 회복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한국의 민주주의 강도와 깊이에 대해 매우 안심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87년 한국이 민주화된 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가 통치 문제로 미국의 부장관으로부터 공개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백악관 인도·태평양 정책 조정관을 역임한 캠벨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아시아 차르’로 불리며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실세다.
그는 지난 4월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에 대해 “한일 두 정상이 매우 어려운 역사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결단은 놀라웠다”며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랬던 캠벨이 ‘위법’ ‘오판’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 차원의 ‘경고’라는 분석이 나온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4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민주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도 전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TV 발표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깊은 우려를 갖게 됐다”고 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역시 같은 날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어떤 정치적 의견 차이도 법치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야당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는 방식을 지적한 것이다.
한미 관계에 밝은 한 미국 전문가는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잇따라 나서서 윤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윤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경고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북한·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입지가 불안해져 한·미·일 3국 협력 체제에 금이 갈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은 2016년 부통령일 때 출장 일정을 조정,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차관협의회에 참석할 정도로 3국 협력을 중시한다. 지난달 페루 리마 APEC(아태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한·미·일 3국 정상회의에서 그는 “우리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최초의 정상급 회담을 개최, 3국 간 완전히 새로운 협력 시대를 열었다”며 “(3국 정상회의가)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내년 1월 트럼프 행정부에 합류하는 인사들도 한·미·일 3국 협력 체제의 유지 및 확대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어 윤 대통령의 거취는 미국에서 계속 주시하는 중요한 사안이 됐다.
미국의 이 같은 경고와 견제에 윤석열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나 내부적으로는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미 국무부 부장관이 나서서 윤 대통령을 ‘공격’했으나, 대통령실과 외교부의 누구도 이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외교부는 다음 달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분위기다. 외교부는 지난달 미 대선 후 막후 교섭을 통해 트럼프 취임식 전에 윤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번 계엄 파문으로 이 같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보는 분위기다. 외교 소식통은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트럼프가 머무는 마러라고를 전격 방문한 것처럼, 윤 대통령도 트럼프 취임 전에 면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며 “막후에서 여러 파이프 라인이 가동 중이었는데 이제는 성사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