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당초 회담이 유력시된 21일 아침(현지 시각)까지도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발표하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지난주 순방 사전 브리핑에서 유엔총회를 계기로 뉴욕에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 양국이 합의했다고 발표했었다. “양국이 흔쾌히 합의했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그런데 이후 일본 측에서 “결정된 게 없다”고 반발하고 나오면서 난기류가 발생한 것이다. 한일 양국은 막판까지 물밑 조율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상회담 직전까지 성사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소리가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외교가에서는 좀처럼 뚫기 어려운 장애물이 가로놓인 한일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번 순방에 나서기 전인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유엔총회 때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일본 측과 합의해 놓고 시간을 조율 중”이라고 발표했었다. 이후 윤 대통령은 2년 10개월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는 평가 속에 지난 18일 영국 런던으로 출국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하고 19일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으로 건너왔다. 윤 대통령은 20일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고, 22일 오후 다음 순방지인 캐나다로 출국할 예정이다. 이런 일정을 고려하면 한일 정상회담이 가능한 시점은 현지 시각으로 21일 오후 정도였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21일 오전까지도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진전된 상황이 나오는 대로 말씀드리겠다”고만 했다. 반면 일본 언론들은 전날 기시다 총리가 한국 측이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이날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 “기시다 총리가 ‘그렇다면 만나지 않겠다’는 반응까지 보였다”고 전했다. 지난 15일 대통령실에서 정상회담 개최 발표가 나오자 당시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발표를 삼가달라”며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사히신문은 “두 정부 간 온도 차가 두드러져 회담이 열릴 전망이 나오지 않는다”며 “만나더라도 단시간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도 했다.
양국 정부가 정상회담을 두고 난기류에 휩싸인 것은 일제 강제 동원 노동자 배상 문제 등 의제 조율에 난항을 겪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는 ‘징용공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한국이 제시하는 게 (정상회담의) 전제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뉴욕에서 만나 징용공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나눴지만,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최근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집권 자민당 지지 기반인 보수층을 의식, 한일 관계 개선에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최근 일본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지지한다’를 넘어서는 역전 현상이 일제히 나타났다. 대통령실은 비공식적으로 “회담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서도 일본 내 정치적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통령실이 막판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도 회담 성사를 위해 기시다 총리 입장을 배려한 것이란 말도 나왔다.
애초 21일 회담이 유력했던 한미 정상회담도 유동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국내 정치 일정 때문에 상당수 나라 정상과의 양자 회담 일정에 조정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회담도 약식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 대통령은 21일 저녁 뉴욕에서 유엔총회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을 초청해 리셉션을 연다. 윤 대통령은 회담이나 회동이 성사되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불이익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