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이 대만해협을 둘러싸고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중국 정부 초청으로 이번 주말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를 방문한다. 샤먼은 중국에서 대만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각 미국에선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가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다. 중국이 미국의 동맹국 중 ‘약한 고리’로 여기는 한국을 대미(對美) 경쟁의 요충지로 끌어들이자, 미국은 태평양 패권 경쟁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해군 기지에서 한·미·일 3각 협력을 다지는 것이다. 미·중 사이에 낀 문재인 정부의 ‘줄타기 외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용 외교부장관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지난 2018년 9월 8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에서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원과 면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정 장관은 31일 기자회견에서 “4월 2~3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차 샤먼시를 방문한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취임 이후 정 장관의 첫 해외 출장으로, 외교장관이 미국에 앞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엔 정부 전용기(공군 5호기)까지 이용한다. 정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기존 일정이 푸젠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중국이 샤먼에서 회담을 여는 이유는 한국을 반중(反中) 연대에서 분리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도 이날 “4월 2일(현지 시각)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3자 대화한다”고 밝혔다. 시차를 감안하면 한국 시각으로 한·중 회의가 열리는 3일에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가 열릴 가능성이 크다. 백악관은 이번 회의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핵심 사안에 대한 협력을 확대 심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중 압박이 이번 논의의 주제가 될 것임을 사실상 예고한 것이다.

정의용(가운데) 외교부 장관이 31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디지털 콘텐츠 제작용 ‘MOFA 스튜디오’ 개소식에서 손뼉을 치고 있다. 정 장관은 이날 디지털 공공 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1기 코리아즈(KOREAZ)’ 명예 기자들(정 장관 양옆)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뉴시스

정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과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가 거의 동시에 열리는 데 대해 “우연”이라고 했다. “미·중은 우리의 선택 대상이 결코 아니며, 미국이나 중국도 우리에게 그런 요구를 해 온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기류는 이와 차이가 있다. 지난해 6월 이수혁 주미대사가 “한국은 이제 미·중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 나라”라고 했을 때, 미 국무부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한국은 수십 년 전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을 때 이미 어느 편에 설지 선택했다”고 했다. 사실상 ‘한국은 미국 편에 서야 한다’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이런 미국의 기조는 전임 트럼프 행정부나 현 바이든 행정부나 차이가 없다. “미국이 선택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정 장관 발언은 희망적 사고라는 지적이다.

미·중 사이에서 이런 모호한 입장 때문에 한국이 스스로 ‘중국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이 한·중 외교장관 회의 장소로 대만을 코앞에 둔 샤먼을 점찍은 것도, 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국을 흔들기 위한 노골적인 제스처일 가능성이 크다. 샤먼항 4㎞ 앞에는 과거 중국과 대만이 55만발의 포탄을 주고받은 대만 땅 진먼다오(金門島)가 있다. 샤먼에서 대만섬까지는 약 220㎞ 떨어져 있다.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 “한·중 관계는 심화 발전의 중요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며 “이번 방문을 통해 전략적 소통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부단한 발전을 추진하길 원한다”고 했다. 한국이 ‘전략적 상대’란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미국도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 장소를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아나폴리스로 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해군이 중국 견제의 최선봉에 서는 상황에서 해사(海士)로 한·일 대표단을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메시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성명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 코로나 대응 등 다양한 이슈와 우선순위에 대해 협의할 것”이라며 “이번 만남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에서 우리의 공동 번영을 증진하고 주요 이슈에 대한 우리의 협력을 심화·확대하는 데 우리가 두고 있는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중국 견제를 상징하는 문구인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거론하면서 ‘주요 이슈’ ‘중요성’이란 표현을 썼다. 국내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 재검토를 마무리하면서 한·일 안보실장을 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의 속내는 중국 견제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대만을 고리로 한 반중(反中) 전선을 더욱 다지는 분위기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0일 4월 초 개최 예정인 미·일 정상회담 공동 문서에 ‘대만해협’ 안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명기하는 방안에 대한 조율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양국 정상회담 공동 문서에 대만 문제가 들어간다면 1969년 이후 처음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