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한국에 동결된 석유 수출 대금을 코로나 백신으로 맞바꾸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계획적으로 우리 상선을 나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5일 알려졌다.

이란이 한국에 동결된 석유 수출 대금을 코로나 백신으로 맞바꾸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계획적으로 우리 상선을 나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5일 알려졌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전날 ‘해양 오염’을 이유로 한국 국적의 ‘한국케미’호를 나포하고 한국인 5명 등 선원 20명을 억류했다.

정부는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로 국내 은행에 동결된 이란의 석유 수출 대금 70억~80억달러의 처리 문제를 이란 측과 협의해 왔다. 이와 관련, 호세인 탄하이 이란·한국 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3일(현지 시각) 이란 ILNA통신에 “2일 에스하그 자항기리 수석 부통령을 만나 코로나 백신 등을 사는 데 동결 자금을 쓰는 방법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란이 동결 자금으로 백신을 확보하겠다는 뜻을 전해오면서 정부는 제재 주체인 미국과도 협의를 진행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재무부의 특별승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내 은행들은 제재 위반 소지가 없는 자금 이전 방안을 마련해 이란 측에 제시했으나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지난 4일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에 이란 혁명수비대가 타고 온 고속정(오른쪽 작은 선박)에서 내려 한국케미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을 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한국케미 선박 관리회사에서 보여주고 있다./ 김동환 기자

이번 나포 사건은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백신 구입 문제를 포함해 동결 자금의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이란 출장(10~12일)을 앞둔 상황에서 일어났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이른 시일 내에 실무대표단이 현지에 급파돼 이란 측과 교섭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는 이날 사이드 바담치 샤베스타리 주한 이란대사를 초치해 선박 나포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란 알리 라비에이 정부 대변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 선박을 ‘인질'로 삼았다는 관측에 대해 “만일 인질극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국 정부가 근거 없이 우리 돈 70억 달러를 동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 해군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4400t급)을 긴급 출동시킨 데 이어 상황점검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실무조정회의를 잇따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6일 긴급 간담회를 연다.

미국에선 이번 나포가 미·이란 갈등의 여파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4일(현지 시각) “미국은 운반선을 즉각 석방하라는 한국의 요구에 동참한다”는 입장을 냈다.

韓·美, 백신 대금 내는데 합의… 이란이 막판 걷어찼다

이란이 우리 선적 ‘한국케미호’를 나포한 배경으로 거론되는 한국 내 ‘이란 자금’은 이란이 지난 2년여간 한국에서 빼 가지 못한 8조원 안팎의 돈을 말한다. 이란이 보유한 해외 자산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 돈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가 이란과의 핵합의를 탈퇴하고 대(對)이란 제재를 강화하면서 국내 은행에 동결된 상태다.

선박 나포 문제로 5일 외교부에 초치된 사이드 바담치 샤베스타리 주한 이란 대사. /연합뉴스

◇대부분이 이란의 원유 수출 대금

한국과 이란 정부는 2010년 미국이 이란에 대한 금융 제재에 나서면서 달러 송금길이 막히자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에 원화 결제 계좌를 만들어 수출입 대금 용도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예를 들어 이란이 한국에 원유를 수출하면 대금을 달러 대신 원화로 지급해 이 계좌에 쌓아두고, 이란이 한국 기업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할 때 이 계좌에서 돈을 빼서 한국 기업에 지불하는 방식이다.

이런 상계 방식으로 무역을 하면 이란에 직접 달러화가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 당시에는 한국이 지불한 원유 대금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전용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미 정부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 방식이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한국은 이란에 자동차 부품과 화학제품을 주로 수출하고, 원유를 수입했다. 한국의 이란 원유 의존도는 10% 안팎이었고, 2013년까지만 해도 양국 교역량은 100억달러에 달했다.

이란 갑자기… 드론 군사훈련 공개 - 이란군 관계자들이 이란 중부의 모처에서 훈련을 앞두고 대기하고 있는 드론을 점검하고 있다. 이 사진은 이란군에서 5일(현지 시각) 배포한 것으로 훈련 일시와 장소는 공개되지 않았다. /AFP 연합뉴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아예 이란과 교역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강화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기업은행의 이란 중앙은행 명의 계좌는 묶였고, 이란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은 영업이 정지된 뒤 돈을 한국은행에 임시로 예치해야 했다. 이 3개 은행에 있는 이란 자금이 8조원 안팎, 달러로 환산하면 70억달러 정도라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한다. 돈이 동결된 후 제재를 받지 않는 인도적 차원의 의료품 수출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워낙 소규모였다. 8조원이라는 거액을 이란이 회수하거나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 선박 나포해 담보 삼을 가능성”

그간 이란은 이 동결 자금을 해제하라고 한국 정부에 강하게 요구해 왔다. 우리 정부는 최근 코로나 피해가 큰 이란에 한국산 의약품과 방역 장비 등을 수출해 대신 갚는 방식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부 이란 측 인사들이 ‘액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불만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해에는 이란 내 코로나 상황이 악화하자 강경파 정치인들이 “한국이 원유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백신을 구하지 못해 그렇다” “한국과 미국은 주종관계”라며 반한(反韓) 감정을 고조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게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통해 코로나 백신을 확보하고 이 대금을 한국 내 동결 자금으로 납부하는 방안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코백스 대납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었다”며 “미 재무부로부터 특별 승인도 받은 상태였다”고 했다. 코백스 퍼실리티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주도하는 코로나 백신 공동 구매 및 배분 사업이다. 인도적 금융거래라 제재 사안이 아니며, 8조원 중 1000억원 미만의 돈을 코백스에 선금으로 지불하는 것이라 미국 동의도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란은 이 자금이 달러화로 환전돼 미국 대형 은행으로 송금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이 돈을 동결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란이 미국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금을 확실하게 받아내기 위한 ‘담보’로 한국 선박을 나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미가 백신 대금 대납에 합의했지만, 이란이 미국을 믿지 못해 걷어찼다는 것이다. 이란이 나포 명분으로 내세운 ‘해양 오염 행위’는 핑계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란이 이날 자국 매체를 동원해 선박 나포 장면을 동영상과 사진 등으로 공개한 것도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트위터에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나포 과정에서 고속정과 소형 보트 등 최소 5척의 중소형 함정과 헬기까지 동원됐다. 다만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선박 나포와 코백스 대납 문제를 연결시키는 데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란 측에 이번 선박 억류와 원화 대금을 연계해서 협상하자는 의도가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절대 아니다’라고 1차적 대답이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