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3일 대통령 재임 중엔 형사재판을 중지하는 ‘재판 중지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아예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전날 재판 중지법을 ‘국정 안정법’이라며 이달 중 처리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하루 만에 철회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은 이날 “대통령을 정쟁의 중심에 끌어넣지 말라”며 당과 선을 그었다. 정치권에선 “정청래 대표를 향한 경고성 메시지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당 지도부가 간담회를 통해 국정 안정법(재판 중지법)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며 “관세 협상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성과 홍보 등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실과 조율을 거쳤다”고도 했다. 다만 민주당은 연내 법안 발의를 목표로 법원행정처 폐지는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김대웅 서울고법원장이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재개 가능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그렇다”고 답한 직후부터 재판 중지법 처리를 주장해왔다. 특히 대장동 일당 1심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지난달 31일 이들에게 징역형을 내려 법정 구속하고, 판결문엔 이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도 담자 재판 중지법 처리를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재판 중지법은 지난 5월 1일 대법원이 이 대통령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다음 날 발의됐다. 같은 달 7일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까지 통과됐다.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친여 유튜버 김어준씨도 최근 ‘재판 중지법 처리’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무리하게 법안 처리를 하지 말라”는 뜻을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통해 당 지도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도 이날 “재판 중지법은 불필요하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고 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5월 재판 중지법이 법사위를 통과한 이후에도 당에 “내 문제에 대해서는 (입법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해,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 처리가 안 됐다.
이와 관련, 강 비서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헌법 84조(대통령 형사사건 불소추 특권)에 따라서 형사재판이 중지된다는 게 다수 헌법학자의 견해이며 헌법재판소도 같은 취지로 해석했다”며 “입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여당의 입법 추진 방침에 대통령 비서실장이 나서서 반대 입장을 직접 설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강 실장은 “대통령을 정쟁의 중심에 끌어넣지 않아 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했다. APEC과 한미·한중 정상회담 성과가 있고 코스피 지수도 상승세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당이 굳이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이슈로 부각하고 있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일부 민주당 의원도 “집권 여당이 대통령실과 불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정청래 대표를 겨냥했다. 박홍근 의원은 페이스북에 “당의 대응이 오락가락”이라며 “주요한 현안일수록 지도부는 대통령실과 소통해 대통령의 국정 운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했다. 여권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들도 온라인상에서 “이 대통령의 호재가 있을 때마다 정 대표가 찬물을 끼얹는다”고 비판했다. 정 대표는 지난 9월 이 대통령이 첫 유엔(UN)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기간에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 등으로 “자기 정치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날 이 대통령 대장동 사건을 두고 “정치 검찰이 만든 악의적 공소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했다. 정청래 지도부가 추진했던 ‘재판 중지법’과 달리, 대통령의 사건 자체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재판 중지법은 처리돼도 대통령이 퇴임하면 재판이 재개되기 때문에 이 대통령 측근들은 “진짜 대통령을 위한 것은 재판 중지가 아니라 공소 취소”라고 해왔다. 공소 취소는 법무 장관이 검찰총장을 지휘해 할 수 있는데, 정성호 법무 장관은 지난 6월 “대통령 사건은 공소 취소가 맞다”고 답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