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 9분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 여야 의원과 보좌진, 취재진으로 가득 찬 회의장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이 입장했다. 조 대법원장이 인사말을 시작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조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 왔으며, 정의와 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재명 대통령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이후 조 대법원장을 겨냥해 ‘사법 내란’이라고 공격해 왔다. 조 대법원장은 “사법부를 둘러싼 작금의 여러 상황에 대해선 깊은 책임감과 함께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도, 법사위가 국감 증인으로 채택한 데 대해선 “삼권분립 체제를 가지고 있는 법치국가에서는 재판 사항에 대해 법관을 감사나 청문의 대상으로 삼아 증언대에 세운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6분의 인사말이 끝나자 민주당 소속 추미애 법사위원장은 조 대법원장에게 “이석하라”고 말하는 대신 의원 질의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대법원 국감에선 대법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이석하면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해 왔는데 이런 관례를 깬 것이다. 앞서 조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던 추 위원장은 이날 조 대법원장은 증인이 아닌 참고인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참고인은 본인이 동의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질의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은 조 대법원장에게 2심에서 무죄가 난 이 대통령 선거법 사건을 파기 환송한 이유를 밝히라고 압박했다. 서영교 의원은 “조 대법원장에게 묻겠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만난 적 있는가.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는 만난 적 있는가”라고 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미 지난달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박균택 의원도 “제1 야당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군사 작전 같은 속도로 처리했는데 옳았다고 생각하느냐”고 했다. 총선 전 이 대통령의 대장동 사건 등의 변호인이었던 박 의원이 국회의원이 돼 대법원장을 공개 압박한 것이다. 전현희 의원은 “기존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명백한 무죄인데도 유죄 판결을 했다”고 주장했다.
무소속 최혁진 의원은 일본식 복장에 조 대법원장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들어 논란이 됐다. 사진 아래엔 ‘조희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합성어인 ‘조요토미 희대요시’라고 적혔다. 인터넷에서 일부 여권 지지자가 조 대법원장을 비난할 때 쓰는 표현이다. 최 의원은 문재인 청와대 사회적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지난 총선에 민주당과 군소 정당이 만든 비례 위성 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서 비례 후보로 공천, 당선됐다.
국민의힘은 “대법원장을 감금하고 진술을 강요한다”며 항의했다. 나경원 의원은 “추 위원장의 논리대로라면,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도 국정감사에 나와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의원들이 ‘이재명 무죄’를 주장한 데 대해선 “위헌적 재판 개입 행위를 즉각 중지하라”고도 했다. 주진우 의원은 “이재명 피고인이 나오시라. 재판을 다시 해보자”고 했다. 신동욱 의원은 “(오히려 대법원이) 파기 자판해서 이 대통령이 출마를 못 하게 했어야 역사의 양심에 맞는 일”이라고 했다. 파기 자판은 대법원이 원심 파기 후 사건을 하급심에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하는 절차다.
질의 도중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87년 체제 이후 대법원장이 국회에 나와서 재판 사안에 대해 일문일답한 적이 없다”며 조 대법원장의 이석을 요청했지만 추 위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조 대법원장은 침묵했다. 때로는 눈을 감고 여야 의원들의 질의와 고성을 들었다. 조 대법원장은 국감이 중지된 오전 11시 38분쯤에야 이석했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이날 법사위 국감에 대해 “광란의 홍위병쇼. 사법부 수장이 완장 찬 질 떨어지는 정치 폭력배들에게 인질로 잡혀 한 시간 반 동안 조리돌림당하는 21세기 인민재판의 현장”이라고 했다.
법사위는 오는 15일 대법원 현장 국정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민주당이 사법부에 비상 계엄 관련자들의 신속한 유죄 선고를 압박해, 내년 지방선거를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전략 같다”는 해석이 나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비겁하고 오만했다”고 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민주당은 국회의원의 권한을 최대한 남용해 사법부와 대법원장을 최대한 능멸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