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사거리. ‘민족의 성지인 서대문 독립공원 주변에 현수막 설치를 금지합니다’라는 서대문구청 현수막 바로 위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이게 국익입니까?’라는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맞은편에는 ‘나라 망치는 거짓 선동’이라는 국민의힘 현수막이 보였다.

'현수막 금지' 현수막 옆에 또 붙은 與野 현수막 -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사거리에 현수막이 여럿 걸려있는 모습.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현수막 설치를 금지한다”고 적힌 서대문구청 현수막 위로 더불어민주당의 “이게 국익입니까?”라는 현수막이 달려있다. 그 왼쪽으로는 국민의힘 현수막 2개와 진보당 현수막이 있다. /남강호 기자

전국 곳곳 교차로와 횡단보도에 여지없이 걸려 있는 정당 현수막이 공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민주당이 내건 ‘정순신판 글로리, 연진아 네 아빠도 검사니?’라는 현수막 아래 국민의힘이 내건 ‘이재명판 글로리, 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지’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식이다. 도시 미관은 물론 시민들의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이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지난 12월부터 시행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야는 작년 5월 정당 활동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며 정치적 현안에 대한 현수막은 사전 신고나 허가 없이 수량과 규격 제한도 받지 않고 원하는 곳 아무 데나 설치할 수 있도록 이 법안을 합의 처리했다. 기존에는 정당 현수막도 지자체 허가를 받고 지정된 게시대에만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 공해 수준의 현수막이 난립하면서, 운전자 시야를 가리고 행인이 현수막 줄에 다치는 사고까지 일어나자 여야는 법 시행 석 달 만에 현수막 규제를 원상 복귀시키는 재개정안을 발의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의 허술한 입법 실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난달 “법 개정으로 이런 일이 생겼지만 재개정해서 (현수막이) 남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법안 통과를 주도한 민주당 역시 지난 28일 정당 현수막의 장소와 개수를 제한하는 재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당 현수막을 사전 신고 및 허가도 받지 않고 수량 제한 없이 15일간 마음대로 걸 수 있도록 하는 옥외광고물법이 2020~2021년 더불어민주당 김민철·서영교·김남국 의원에 의해 발의되자 정부는 당시 “규제를 받는 일반 사업자 현수막과의 형평성, 정당 홍보물의 난립, 주민의 불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작년 5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행안부 차관은 “주민들 입장에서 교통이나 환경 관리 차원의 어려움이 있는데, (규제가) 완전히 풀리면 그걸 지자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느냐는 의견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법안을 대표 발의한 민주당 김민철 의원은 행안위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정당 활동을 알리는 현수막을 정부가 도시 미관이라는 이유로 제지하면 되느냐”고 했다. 일반 현수막과의 형평성 지적에는 “정당 활동 현수막이 일반 사업자 현수막과 비교가 돼야 하는지 유감이다. 헌법에 보장된 부분이 정당 현수막이 훨씬 높도록 돼 있다”고 했다. 김 의원은 지정 게시대에 설치하도록 하는 방안에도 “게시대에 다른 현수막이 있으면 그걸 뗄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한다. 정당 현수막으로 신속하게 입장을 국민들한테 알려야 될 사안들이 많다”며 반대했다.

국민의힘도 비슷했다. 국민의힘 이명수 의원은 “정당 현안·정책을 알리기 위해 현수막을 걸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정부도) 수용해야 한다”며 “지금 불편하고, 교통에 문제가 된다, 하지 마라 이것은 아닌 것 같다. 부작용 때문에 이것을 못 하게 한다는 것은 시대 흐름에 안 맞는다”고 했다. 오히려 민주당 이형석 의원이 “정당이나 정치인들만 자유롭게 현수막을 걸 수 있게끔 되면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법률안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대했지만 소수 의견에 그쳤다. 결국 법안은 국회 행안위·법사위를 일사천리로 통과해 작년 5월 본회의에서 재석 227명 중 찬성 205표, 반대 9표, 기권 13표로 가결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법 시행 이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검찰 소환 및 기소,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회담 같은 정치적 이슈가 이어지면서 상대 당을 향한 무차별적 비방과 인신 공격성 현수막이 아무 제지 없이 난립하는 부작용이 현실화됐다. 한 의원은 “저쪽에서 센 현수막을 걸면 당원들이 ‘우리는 안 붙이냐’고 항의해 결국 맞대응을 하게 되고 ‘현수막 전쟁’ 악순환이 격화된다”고 했다. 지난달에는 민주당이 소속 의원 지역구에 윤 대통령을 ‘매국노 이완용’에 비유하는 현수막을 걸라고 지시했지만 “너무 자극적이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의원들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법안을 처음 발의했던 민주당 김민철 의원은 통화에서 “서울역이나 시청 앞 같은 특수한 몇 군데는 우리가 봐도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긴 하다”면서도 “현행법상 정당만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했는데 각 지역의 청년·여성 위원장 등 관계자들이 불법으로 걸어놓은 것들을 지자체가 떼지 않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개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수막 문구가 과격해지다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법 개정으로 현수막이 더 늘어났다는 통계는 아직 없다”고 했다.

하지만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욕이 나온다”는 일반 시민들의 불만이 쏟아질 정도가 되자 행안부는 결국 지난달 전국 17개 시도 현수막 담당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설치 장소나 크기를 제한하는 시행령 개정 추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달 13일 페이스북에 “현수막은 정치 공해”라고 했다.

여야 역시 법 시행 석 달 만에 다시 재개정안을 발의하며 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분위기다. 국회 행안위 여야 간사인 국민의힘 이만희 의원과 민주당 김교흥 의원은 4일 ‘정당 현수막!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정책 토론회를 연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10일 “여야 정쟁으로 국민이 짜증스러운데 보이는 곳곳마다 인신 공격, 비방형 현수막이 걸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통화에서 “작년 본회의 표결 당시 이러한 부작용이 우려돼 기권표를 던졌었다. 행안위 여야 합의를 통해 개정 법안이 속도감 있게 처리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재개정안을 발의한 데 이어, 지난 28일에는 민주당 박병석 의원과 김민석 정책위의장도 정당 현수막 게시 장소와 개수를 제한하는 내용의 재개정안을 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