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그의 아내 김건희씨에 대해 통신 자료를 조회한 것으로 29일 나타났다. 또한 이날 오후 기준 공수처가 통신 자료를 조회한 것으로 확인된 국민의힘 의원은 총 80명으로 늘었다. 국민의힘 의원 105명 중 3분의 2 이상이 공수처의 통신 자료 조회 대상이 된 것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공수처의 사찰 논란에 “영장에 기초한 집행이지만 공수처 쪽에서 적절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수사 일반 현안이나 (공수처) 존폐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번 공수처의 통신 조회는 사찰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태희(왼쪽 두번째) 국민의힘 총괄상황본부장이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공수처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국민의힘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회의원 78명과 윤석열 대선 후보에 대해서는 10회, 후보 가족에 대해서는 9회의 불법사찰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왼쪽은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국회사진기자단

지금까지 공수처는 윤 후보에 대해 3회, 김씨에 대해 1회 통신 자료를 조회한 것으로 파악됐다. 윤 후보에 대해서는 서울중앙지검도 4회, 인천지검 1회, 서울경찰청 1회, 관악경찰서 1회씩 통신 자료를 조회했다. 김씨에 대해선 서울중앙지검이 5회, 인천지검이 1회 통신 자료를 들여다봤다. 윤 후보 조회 시기는 공수처 9~10월, 중앙지검 5~6월, 10~11월이었고, 아내 김씨에 대한 조회 시기는 공수처 10월, 중앙지검은 5~6월과 8월이었다. 윤 후보가 지난 3월 검찰총장에서 물러나고 6월 정치 참여를 선언하는 등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설 때 수사기관들의 통신 자료 조회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윤 후보는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 등으로 지난 9월부터 피의자로 입건된 상태다.

국민의힘은 “무소불위 권력의 불법 사찰 민낯이 드러났다”며 김진욱 공수처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윤 후보는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수사기관을 만들어놨더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정보기관의 국내 파트 역할을 하고 있다”며 “대통령이 되면 공수처의 불법행위에 책임 있는 자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김기현 원내대표는 “윤 후보가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 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돼 있는 걸 감안하더라도, 후보 아내까지 수사기관이 무더기로 조회한 것만 봐도 명백한 정치 사찰”이라고 말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는 “만약 불법 사찰이 있었다면 큰 문제라 생각하지만, 통신 자료를 협조받은 게 어떤 성격의 것인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불법 사찰 의혹에 대해 해명할 예정이다.

한편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6월 9일 국민의힘 김한길 새시대준비위원장과 윤 후보 여동생 윤모씨를 대상으로 통신 자료를 들여다본 사실도 이날 추가로 확인됐다. 당시 김 위원장은 정치 참여를 선언하기 전 윤 후보와 자주 통화했다고 한다.

공수처가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윤 후보 아내 김건희씨를 비롯해 야당 의원 80명에 대해 무더기로 통신 자료를 조회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수처를 둘러싼 ‘불법 사찰’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당내 선대위 종합상황실에 ‘불법 사찰 국민신고센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공수처는 윤석열 후보에 대해 9월에 2회, 10월에 1회 통신 자료를 조회했다. 윤 후보의 아내 김건희씨는 10월에 1회 통신 자료를 조회당했다. 9월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한 시점이다. 법조인들은 “김씨의 경우, 정치권 인사나 공수처 수사 대상인 고위 공직자와 통화했을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남편인 윤 후보의 통신 수·발신 내역에서 번호가 나와 통신 자료를 조회당했을 것”이라며 “이는 공수처가 통신영장을 발부받아 윤 후보의 통화 상대방을 모두 뒤졌다는 의미”라고 했다.

공수처는 법원을 통해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 유력 대선 후보의 통화 내역을 모두 뽑은 것은 과잉 수사”라며 “그 무렵 진행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영향을 미치려던 의도가 의심된다”고 했다. 실제 지난 10월 공수처 검사는 ‘고발 사주’ 의혹으로 입건된 손준성 검사에게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일정 등을 고려해 조속한 출석이 필요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또 여권 인사들이 ‘강도 높은 수사’를 주문할 때마다 공수처가 손 검사에 대해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상황도 반복됐다.

공수처는 통신영장을 발부받아 국민의힘 의원들의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도 턴 것으로 알려졌다. 카카오의 경우, 수사기관이 특정 시기를 지정해 영장을 제시하면 대상자가 포함된 대화방 참여자의 전화번호와 로그 기록을 제공한다고 한다. 다만 대화 내용은 서버에 2~3일만 저장되고 삭제되기 때문에 제공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국민의힘 의원들에 대한 대규모 통신 자료 조회로 이어졌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한 법조인은 “그동안 사정 기관은 ‘선거 개입’ 논란 때문에 주요 선거가 다가오면 하던 수사도 중단하는데 공수처는 이런 관행을 깨버리며 ‘대선 개입’ 비판을 자초했다”고 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와 임태희 중앙선대위 총괄상황본부장은 29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은 당장 공수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임 본부장은 “민주 국가에서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임 본부장은 “김진욱 공수처장은 구속돼야 마땅하고 당장 감옥에 보내야 한다”며 “국회 차원에서 김 처장에 대해 철저히 책임을 묻고 모든 조치를 통해 즉각 탄핵시키겠다”고 했다.

윤 후보는 “짐작은 했지만, 이런 공수처를 만들려고 (정부와 여당이) 그렇게 무리를 했는가”라며 “자기들이 맨날 비판하던 과거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나 있던 짓을 하는 걸 보니 결국 국민에 대한 입법 사기를 벌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겨냥해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거 통신 사찰을 당했는데, 제가 볼 때는 대선도 필요 없고 곱게 정권 내놓고 물러가는 게 정답”이라고 했다.

한편 ‘신(新)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전대협) 소속 회원 6명에 대해서도 공수처, 인천지검 등 수사기관이 통신 자료를 조회한 것으로 이날 확인됐다. 신전대협은 1980~90년대 대학생 운동권 단체인 전대협의 이름을 풍자해 사용하는 보수 성향 청년 단체다. 지난해 전국 420여 대학교에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 5000여 장을 붙인 바 있다. 신전대협 김태일 의장은 본지 통화에서 “재판, 수사에 전혀 관련되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 대학원생들에 대해 수사기관들이 정보 통신 조회를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