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에는 이름 없는 별이 새겨진 ‘보국탑’이 있다. 임무 중 목숨을 잃은 국정원 요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한 명 순직할 때마다 별이 하나씩 늘어난다. 국정원 요원은 그 활동 자체가 보안 사항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추모를 할 수 없다. 국가정보원 출신 서경대학교 군사학과 채성준 교수는 조선일보 유튜브 ‘오늘의 대화’에 출연해 “자랑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숙명”을 가진 국정원 요원의 삶에 대해 털어놨다.
◇ “국정원 요원, 싸움 잘해야 하나?”... 007 영화의 오해
흔히 국정원 요원이라고 하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화려한 무술 실력과 사격술을 갖춘 인물을 떠올린다. 최근 개봉한 영화 ‘휴민트’에서 국정원 비밀(블랙) 요원으로 나오는 조 과장(조인성)도 뛰어난 전투 실력을 보여준다. 채 교수는 “국정원 요원은 기본적인 호신술 훈련을 받지만 모두 무술이 뛰어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위험한 현장 작전이 필요할 때는 해당 분야 전문가를 고용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화이트’와 ‘블랙’, 탈법과 불법의 경계
국정원 요원은 신분을 노출하고 활동하는 ‘화이트’와 신분을 위장하는 ‘블랙’으로 나뉜다. 화이트 요원은 외교관 신분을 가지고 활동하며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지만, 블랙 요원은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한다.
해외 정보 활동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동반한다. 우리 국익을 위한 활동이 상대국 입장에서는 국익을 해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채 교수는 “해당 국가의 법 테두리를 벗어난 초법적, 탈법적 활동을 수행하다 발각될 경우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거나 요원 개인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 정보관의 진짜 능력은 ‘에이전트 관리’
국정원 요원이 직접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채 교수는 정보관의 핵심 능력은 현지 협조자, 즉 에이전트(Agent)를 얼마나 잘 포섭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적임자 물색부터 채용, 관리, 해고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진행된다. 채 교수는 “에이전트를 철저히 내 편으로 만들고, 만약 배신할 경우를 대비해 약점을 확보하는 등 고도화된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했다.
◇ 가족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 그리고 ‘이름 없는 별’
국정원 직원의 신상은 철저히 기밀이다. 국정원장 등 극소수 간부를 제외하고는 신원 공개가 금지돼 있다. 채 교수는 “자신이 국정원 직원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은 90% 이상 가짜”라고 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구체적인 업무를 알리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익명성은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정원의 경우 순직자가 수행하던 임무 자체가 국가 기밀인 경우가 많다. 사망 원인이나 경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작전 내용이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일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채 교수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국정원 요원의 순직을 예로 들었다.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최덕근 영사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흉기로 습격 당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최 영사는 사실 국정원 요원으로, 북한 마약 밀매 및 위조지폐 관련 정보를 수집하던 중 북한 요원에 의해 암살 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정부는 대외적으로 ‘외교부 영사의 사망’으로만 발표했다.
◇ “성공은 침묵 속에, 실패는 요란하게 비판”
국정원의 성공한 공작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지만, 실패한 공작은 온 세상에 드러나 질타를 받는다. 그는 “일반 공무원은 승진하면 축하 난이 쇄도하지만, 국정원 요원은 1급 고위직까지 올라가도 동료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국정원 직원들의 보수나 처우가 조금 더 나은 것은 이러한 위험수당과 ‘익명 속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차원이라고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 유튜브 ‘오늘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