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공습 사태 등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도 외국인들은 신년 들어서만 국내 주식을 2조8000억원어치 사들이며 강한 매수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원·달러 환율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환율이 1480원을 넘어서자 정부는 국민연금과 외환스와프 확대 등 강력한 시장 안정화 대책을 내놓았다. 환율은 즉각 1440원대로 급락하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새해 들어 다시 1450원 선을 위협하며 상승세로 돌아섰다. 상황을 종합해보면 환율 상승에 따른 ‘뉴노멀’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민연금을 활용한 환율 안정화 카드는 과연 지속 가능한 정책이 될 수 있는가.
‘1400원대 환율’ 일시적 사태 아냐
전문가들은 현재의 환율 상황을 단순한 일시적 변동이 아닌,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변화의 시작이라고 진단한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12월 29일 “정부 대책으로 단기적인 상승 심리는 진정됐지만, 구조적인 상방 압력이 여전해 이미 높아진 환율 상단에 시장이 더 쉽게, 더 자주 접근할 것”이라며 “과도한 수급 쏠림이 완화되는 상반기엔 유의미한 환율 하락이 예상되나, 하반기에는 다시 반등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라고 파악했다.
한·미 양국의 경제 펀더멘털 역전도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 1월 8일 국제금융센터와 주요 투자은행(IB) 8곳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는 2.3%로 상향된 반면, 한국은 이에 미치지 못하며 성장률 격차가 0.3%포인트로 벌어질 전망이다. 여기에 한국(2.50%)보다 높은 미국의 기준금리(3.50~3.75%) 기조가 2022년부터 장기화되고 있다. 성장률과 금리 모두 미국이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원화 가치 하락은 피하기 어려운 흐름이 됐다.
이동현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 역시 잠재성장률 둔화와 한·미 성장 격차, 미 관세 정책에 따른 수출 여건 악화 등을 원화 약세의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종합하면 1400원대 환율은 비상대책으로 막아낼 수 있는 일시적 사태가 아닌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새로운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출된 ‘정부카드’ 투기세력엔 기회?
경제전문가들은 정부의 연금 방패가 단기적으로 환율 상단을 누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장경제 원리 측면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책 의도가 시장에 너무 투명하게 읽히면서 시장의 자정작용을 저해하고, 오히려 특정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경제 메커니즘에서 가격 저항선이 정책적으로 고착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다. 정부가 1480원에서 연금을 동원해 방어에 나선 사실은 시장에 당국의 최종 마지노선이 어디인지를 공시한 것과 다름없다. 정보 비대칭성이 해소되면 글로벌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은 리스크가 극도로 낮은 도박이 가능해진다. 특히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직접 투입하는 정공법 대신 ‘연금 스와프’라는 우회로를 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에는 “당국이 가용한 실탄(외환 보유액)이 넉넉하지 않거나, 대외 신인도 하락을 우려해 개입을 꺼린다”는 약점 노출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1480원 위로는 정부가 막아줄 것이라는 일종의 안전판이 생겼다고 판단한 세력들이, 환율이 마지노선에 근접할 때마다 집중적으로 원화를 매도하는 일방향 베팅에 나설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이러한 상시 개입은 시장의 자율적인 수급 조절 기능마저 마비시킬 수 있다. 본래 환율이 오르면 수입이 줄고 수출이 늘어나며 자연스럽게 환율이 내려가는 자정작용이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특정 가격대를 고수하겠다는 시그널을 보내면 시장 참여자들은 스스로 리스크를 관리하기보다 정부의 대응만 바라보는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된다. 특히 베네수엘라 사태 같은 외부 충격 발생 시, 시장의 힘으로 분산되어야 할 리스크가 정부의 방어선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오히려 변동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이나 채권을 사기 위해 막대한 양의 달러를 상시 구매해야 하는 큰손이다. 그런데 시장 원리가 아니라 정부의 요청에 따라 달러 매수를 멈추거나, 거꾸로 달러를 파는 계약(환헤지)에 나서는 건 시장의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할 달러 가격이 인위적으로 비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노후 자금 신뢰 문제로 번질 수도
외환 당국은 이런 우려에 대해 ‘국민 노후자산 희생이 아닌 보호’라고 반박하고 있다. 환율이 오를 때 이익을 실현하고 헤지를 통해 수익성을 확보하는 게 장기적으로 국민 노후 자산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11월 27일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높을 때 연금을 환헤지하는 것은 수익성 확보에 도움이 된다”며 “국민 노후자산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1월 2일 신년사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원화를 갖고 나갈 때 원화가 절하되면 미국(해외)에서 수익률이 굉장히 높아지지만 갖고 올 때는 반대로 된다”며 이 같은 상황이 국민연금 수익률뿐 아니라 외환시장에 주는 왜곡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논란의 핵심에는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한다. 이는 단순한 환율 안정 효과를 넘어, 공공자산 운용의 윤리성과 제도적 신뢰의 문제로 이어진다. 국민연금의 최우선 목표는 가입자의 이익과 장기 수익성이다. 비상 상황에서의 한시적 조치는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일한 방식이 반복될 경우 연금의 장기 수익성과 제도 신뢰도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정책적 우선순위는 단기 환율 지표가 아니라 국민 노후 자산의 장기 건전성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연금특위 민간 자문위원이기도 한 배관표 충남대 국가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번 조치가 연금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 교수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이미 연금에 대한 불신이 깊은 상황에서, 국민 동의 없이 노후 자금을 정책 수단으로 동원한 것은 기금 독립성이 실종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언급했다. 이어 “기금 보호를 위해 마련된 각종 규정과 지침이 존재함에도 충분한 논의 없이 개입이 진행된 점은 제도적 신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며 연기금의 의사결정 구조가 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꼬집었다.
또한 배 교수는 이번 개입이 초래할 막대한 기회비용과 실효성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환율 방어를 위해 달러를 묶어두면서 연금이 얻을 수 있었던 추가적인 투자 수익 기회를 원천 차단당했다”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손실은 상당한 수준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경제 위기 때마다 국가 자산을 동원하는 과거의 관행이 되풀이된 고육지책이지만,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임시방편은 결국 단기적인 효과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