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국민의힘이 당명을 개정한 뒤 여섯 번째로 전당대회를 치렀다. 신임 당대표가 된 것은 장동혁 의원이다. 일반여론조사에서 20%포인트 차로 밀렸지만 당원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겼다. 같은 반탄파(탄핵 반대)였던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보다 훨씬 더 강성이라고 평가받아온 것이 주효했다. 장 대표는 재선이지만 2022년 6월 재보궐선거를 통해 초선의원이 된 인물로, 원내 경력이 3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 김문수라는 거물을 꺾은 것은 그가 친윤 의원들은 물론 강성 당원들의 간택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찬탄파의 득표를 합치면 31.61%(조경태 17.57%+안철수 14.04%). 책임당원만 80만명에 육박하는 국민의힘 당원들의 선택이 이렇다. 이제 ‘온건한’ 후보는 선출되기 어렵다. 그럴 인물도 없다는 것이, 그 자체로 원인이자 결과다.
국민의힘에 ‘개혁보수’ 계보가 끊겼다. 민주화 이래 보수정당에서는 ‘5공 당’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세력이 줄곧 존재해 왔다. 재야 출신의 김문수와 이재오가 그랬고,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계가 그랬다. 2000년대에는 이회창 총재가 영입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대표 소장파였고, 2010년대엔 유승민 전 의원을 필두로 한 이준석·김웅 등의 ‘새로운보수당계’도 유의미한 세력을 유지했다. 이들은 때로 대선주자(이명박)를 만드는 데 일조하거나 당이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차단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래 개혁보수를 표방하는 이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대표주자 격인 이준석 의원이 탈당해 차린 개혁신당은 3석에 불과하다. 국민의힘 내 한동훈 전 대표를 위시한 찬탄파가 있지만 넓게 잡아도 원내 10석에 미치지 못한다. 까닭은 복잡하다. 극단적 진영정치가 거대 양당 중도세력의 입지를 좁힌 가운데, 윤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당내 민주주의가 사실상 실종됐고, 민심과 괴리된 당심이 당직이나 대선후보 선출의 근거가 돼 왔다. 민주당 우위의 정치지형이 10여년 지속되며 무엇보다 새로운 어젠다를 창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비민주적 의총 속 사라진 소장파들
국민의힘은 미래통합당 시절 황교안 대표가 이끈 2020년 총선, 한동훈 대표가 이끈 2024년 총선 모두 더불어민주당에 180석을 넘게 내줬다. 80~90명에 불과한 지역구 당선자 대부분이 영남·강원·충청에 한정되고, 수도권 의원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보수 성향의 인물들이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며 원내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공천에서 배제됐다.
22대 국회에서 기존 유승민 전 의원과 가까웠던 인물들은 김재섭·김용태·강대식 의원 정도를 빼면 살아남지 못했다. 계엄 이후 한 전 대표와 함께 움직인 인물은 주로 초선 비례의원들이다. 자연히 당내 의사결정 구조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있던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준석 대표, 윤 전 대통령 체제로 승리했지만 이것이 독이 됐다. 국민의힘은 정권 초반부터 여러 이슈에서 중도층이 기함할 만한 대응을 했고, 여기에 반대할 인사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2022년 7월 이준석 당시 대표가 축출됐다. 명분은 이 대표의 성접대 의혹이었지만, 권성동 당시 대표 직무대행이 윤 전 대통령과 나눈 텔레그램 메시지(이른바 ‘체리따봉 사건’)가 유출되며 본질은 친윤계의 당권 장악 시도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억제기’ 여당 대표가 사라지며 이후 윤 전 대통령의 실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이든-날리면’ 사태, 이태원 참사 수습, 의정 갈등, ‘윤·한 갈등’, 채상병 특검, 김건희 여사 특검 모두 민심과 역행했다. 국민의힘은 이때 윤 전 대통령의 의사에 반하는 어떤 결정도 하지 못했다. 원내를 친윤이 이미 장악하고 의원총회 분위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수도권 지역구 의원들이 좀 나와서 발언을 하지. 그러면 PK·TK 의원들이 나와서 ‘지금 내부총질 할 때냐’는 식으로 얘기를 해. 저쪽(수도권)에서 5명쯤 얘기하면, 거기서 열댓 명 정도가 나와. 그럼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내부총질 안 하는 방향’으로 당론이 정해지니까. 숫자로 도저히 안 돼. 의원총회를 할 필요가 없어.” (국민의힘 소속 21대 국회의원)
“소장파로 알려진 다선 OOO 의원이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할라치면, 아예 말도 못하게 한다. 그냥 내려오라고.” (전 국민의힘 관계자)
윤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의원들이 의원총회 분위기를 ‘보고’한다는 것도 공공연했다. 비주류로 꼽히던 전직 국민의힘 의원은 “대통령과 친밀한 의원은 직접 메시지를 받고, 당내 어떤 의원들이 ‘내부총질’을 하는지는 반대로 전달이 됐다”고 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국민의힘은 영남에서만 이겨도 50석은 만들어낸다는 게 강점이자 약점”이라며 “여당이 되든 야당이 되든 공천만 되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혁신안, 윤희숙 혁신위원장의 혁신안이 모두 의총에서 좌초됐다. 장 신임 대표가 당선된 이후에도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어쩌면 이런 추세는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당권파가 찬탄파 세력을 견제하려 ‘당무감사 후 당협위원장직 박탈’까지 고려한다는 이야기도 돈다. 당협위원장은 차기 총선 지역구 출마자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주간조선이 이에 대해 묻자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제 와서 못할 건 뭐겠나?”라고 반문했다.
민심과 괴리된 경선
선거 때마다 논란이 되는 ‘경선 룰’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상 대표를 선출하는 경선규칙은 ‘당심 80, 민심 20’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당원 선거인단의 투표 80%, 역선택 방지조항(국민의힘 지지층, 무당층만 조사에 포함)을 삽입한 일반국민 여론조사 20%를 통해 대표를 선출했다.
당심의 비율이 높을수록 ‘친윤’에 가까운 인사들이 당을 장악하기 쉽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준석 대표를 축출한 이후 김기현 의원이 대표직에 선출된 2023년 전당대회 규칙은 ‘당원 100%’였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김 의원을 ‘밀어준’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경선 룰도 그런 배경에서 정해진 것이었다. 반대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된 2021년 재보궐선거 경선 룰은 ‘100% 일반 여론조사’였다. 당시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의 의지였다.
친윤이라는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당심과 민심을 적절히 배분해 선거에 승리할 만한 경선 규칙을 만드는 시도는 있어왔다. 한나라당 시절 이회창 후보가 선출된 16대 대선에서는 일반국민 선거인단 50%를 모집해 당심과 민심의 비율을 5 대 5로 맞췄다. 이명박 후보가 선출된 17대 대선에서도 비슷했는데 ‘민심’을 국민 공모 선거인단 30%, 여론조사 20%로 반영하게 했다. 사실 당시에도 당헌은 ‘직접투표 선거인단’과 ‘여론조사 투표자’ 수의 비율을 80% 대 20%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당원뿐만 아니라 일반국민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등의 조정을 통해 민심을 더 반영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현재의 역선택 방지조항을 삽입한 경선 여론조사 조항의 디테일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여론조사는 현재의 국민 여론지형을 반영해 연령과 성, 지역을 할당(‘셀’)하게 되어 있다. 한데 이럴 경우 ‘20대 전라도 지역 여성’ 셀의 응답자는 필요한 할당치보다 응답률이 낮게 나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가중치를 둬야 하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이를 셀별로 0.7~1.5배로 하되 일부 셀은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또 여론조사 종료 시간까지 표본 크기가 미달하거나 초과하면 추가 조사를 하거나 표본을 삭제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통계청장 출신인 유경준 전 국민의힘 의원은 “이렇다면 특정 셀의 응답이 조사에 빨리 응하는 극렬 지지층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직 국민의힘 사무처 당직자는 “여론조사 실무는 그때그때 정하니, 당 주류 입맛에 맞게 세부적인 룰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라고 했다.
2017년 보궐 대선 당시 유승민 전 의원은 바른정당 소속으로 유의미한 득표(6.76%, 220만8771표)를 했다. 이때 2030 청년들의 지지세를 얻으며 ‘개혁보수’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단순히 ‘당내 소장파’에서 사회문화적으로 확장, 이념적 기반을 얻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 등 경제 정책이 ‘포퓰리즘적’이라는 문제의식, 공정에 대한 요구, 급진적 페미니즘의 발흥에 대한 반발심리 등이 작용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젊은 남성들이 보수진영에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에너지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세대포위론’으로 구체화, 2022년 윤석열 정부를 창출했다는 분석까지 있을 정도인데 이를 개혁보수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어젠다 없어 사라진 대선연합
보수진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이후 내놓은 경제적 담론이 부재한 상태다. 이를테면 국민의힘의 현행 강령은 의외로 ‘기본소득’을 긍정한다. ‘국가는 국민 개인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뒷받침한다’는 대목이 있다. 개별적 정책에 대한 논쟁을 떠나, 국민의힘이 우파적 경제 세계관을 독자적으로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지로 싸움을 하면 ‘더 주는’ 편에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화전쟁’에서 어젠다 싸움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대안 우파가 집권하거나 유의미한 세력화가 된 까닭은 진보진영의 정치적 올바름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는데, 한국의 기존 개혁보수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흡수할 역량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석현 어젠다27 대표는 “미국의 트럼프, 이탈리아의 멜로니, 프랑스의 르펜, 독일의 afd(독일대안당), 최근에는 일본의 참정당까지 모두 이 공식을 따랐다”며 “대한민국 보수진영만이 이를 외면하고 회피했다. 안타깝지만 지금 국민의힘에는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개혁보수가 설 땅은 남아 있을까. 윤왕희 성균관대 미래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극단적 정치지형 속, 외연 확장보다는 우리 편의 논리를 강화해 ‘저쪽 편과 잘 싸울 수 있는 사람’만 선호할 것”이라고 봤다.
유경준 전 의원은 “중도지향적인 사람들은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배척하고, 검증이 안된 ‘업둥이’들을 통해 정권을 창출하려 한다면 한계가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결국 분당 수순을 밟는 방법이 있다고도 봤다. 김 평론가는 “공천을 받기 만무해진 상황 속 혁신 보수 연대를 구성해 한동훈, 이준석, 유승민이 함께하는 정당까지 구상해야 할 것”이라며 “(실제 분당에 현실적 제약들이 있지만) 오히려 대선주자급 인물이 모이게 돼, 인물 중심 정치인 한국에서 유리한 면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