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노무현은 대통령 ‘지위’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대통령이라는 ‘직무’가 필요했다.” 그가 이번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슬로건들에는 이러한 노무현의 정신이 묻어있다. ‘나를 도구로 쓰라’ ‘실사구시 대통령’ ‘중도보수당’ ‘먹사니즘’ ‘잘사니즘’…. 지난 6월 4일 취임식에서도 이 대통령은 “박정희, 김대중 정책을 구별 없이 쓰겠다”며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를 천명했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했다. 이번 대선과정을 꿰는 하나의 코드도 ‘노무현’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10여일 앞둔 5월 23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였는데, 심지어 한나라당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의힘의 김문수 후보조차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언급했다.
참여정부가 끝날 시점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상 최대의 표차로 당선된 것은 그 방증이다. 지금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남아 있다. 대북정책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그런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과보다 공이 주목받는 것은 국익을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는 것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은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과거 노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어 보니, 진보 대통령이 진보 정책을 다 할 수가 없고, 보수 대통령이 보수 정책을 다 쓸 수 없다. 결국 중도를 기초로 진보·보수 정책을 가져다 쓰는 길, 결국 중간으로 가더라. 정치가 중심이 아니라 ‘국민의 운명’과 ‘국민의 삶’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또한 그는 ‘매일 새롭게, 일일신 우일신’을 강조했던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며 실용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나선 대통령은 과거 노 전 대통령 시절 추진한 국정운영 방향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反美 노무현의 한·미 FTA 추진
2025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 경제의 최대 변수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이다. 이번 관세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미국은 인접국인 캐나다·멕시코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종료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 이는 한·미FTA가 한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FTA는 노 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표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과의 FTA 협상 추진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8년 2월 14일 자를 보면 한·미FTA 추진 과정이 잘 담겨 있는데, 지지층의 반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006년 3월 28일 영화계와 농민, 학계, 노동계 등 270개 단체가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이들은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면 농업과 중소기업이 망해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투기자본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경북대 교수),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 출신들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정우 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웬만한 나라와 FTA를 맺으면 득이 많다. 이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한·미FTA는 특수하다. 다른 나라는 미국과 같은 FTA를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과의 FTA는 득보다 실이 더 많다.”
노 전 대통령은 지지층의 반대가 거세지자 2007년 3월 ‘한·미FTA 수요자 중심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단의 의지였다. FTA로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난감해지겠는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한·미FTA는 다음에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손해지만 앞으로 국가산업,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에도 관철해 낸 한·미FTA는 한국 경제의 파이를 키웠다. 한·미 무역 규모는 물론이고 투자액까지 훨씬 커졌다. 현재 시점에서 한국 경제에 명백하게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재협상 요구 움직임이 그 증거다. 노 전 대통령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면 이념에 연연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노동운동을 변호하며 입지를 다져온 변호사였다. 그런 그는 반미 성향이 강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럼에도 미국과의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밀어붙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관련자들과 계속 소통하고 토론했다.
한·미 동맹의 상징, 이라크 파병
노무현 정부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라크 파병 또한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정책이다. 반미정권이 국익을 위해 실용주의 입장을 취한 사례다. 당시 미군의 이라크 공격이 실제 감행되자 우리 군의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은 더욱 고조되었다. 여러 시민단체와 일부 언론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해선 안 된다’며 정부 결정을 비판했다. 연일 파병반대 시민단체들의 시위가 열렸고, 국회에서는 여당 의원까지 가세하여 ‘반전평화모임’을 결성해 파병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은 9·11테러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계기이며 동북아 국제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태였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를 보면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엇보다 북핵 상황으로 인한 한반도 안보정세의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에서 숙고를 하면서 관련 부처와 참모진으로 하여금 종합적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중략) 그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동향,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명분 및 한·미 동맹 관계의 중요성 등 제반요소를 감안하였으며, 그 당시 북핵 문제나 경제 문제 등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국민의 정서도 함께 고려하여 미국 등 국가들의 노력을 지지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노조에도 강경대응했던 진보 정권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권 초 업적으로 노조개혁이 꼽힌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회계 투명성 강화, 무분별한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 등이 구체적 사례다. 윤 전 대통령은 2022년 11월 화물연대가 파업에 나서자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정부의 원칙대응에 노조 파업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조기에 끝났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있지만 사실 윤석열식 강경대응이 가능하게끔 법을 개정한 건 참여정부였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2003년 2월 취임과 동시에 지지층으로부터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물연대도 청구서를 날린 곳 중 하나였다. 화물연대는 1차 파업에서 경유세 보전 확대, 고속도로 통행료 감면 등을 요구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정부가 협상을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한 화물연대는 2차 파업에 들어갔고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화물차주에 대해 유가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지도부 16명에 대해 업무방해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등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파업은 16일 만에 종료되었으며, 정부는 이듬해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해 ‘직장복귀명령제’를 도입했다. 파업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협할 경우 대통령이 법원 허가를 받아 노동자의 직장 복귀를 명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는 2022년 10월 윤 전 대통령이 업무명령개시제란 이름으로 처음으로 발동했다.
직접 얼굴 맞댄 토론으로 반대층 설득
참여정부 내내 한·미 관계는 가장 중요한 어젠다였다. 미국은 한·미FTA의 전제조건으로 영화관 스크린쿼터 축소를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영화인들과 직접 얼굴을 맞댔다. 그는 ‘왕의 남자’에 출연한 배우 이준기와도 만나서 “영화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영화 잘 만들) 자신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모두가 스크린쿼터제 축소로 인한 한국 영화, 나아가 문화산업의 식민지화를 우려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후 멀티플렉스의 확장과 함께 시장 자체가 급격히 커지는 결과를 낳았고, 한국영화는 아카데미상을 휩쓰는 작품까지 만드는 문화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좌우를 넘나들며 실용주의 정책을 편 대가는 컸다. 지지율은 빠졌고, 여당도 등을 돌렸다. 결국 ‘최초의 탄핵소추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쓰게 됐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실패한 정책을 펼쳤던 까닭도 있다.
그렇다면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재명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정책들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정책을 보면 힌트가 있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종합부동산세 도입 등 부동산 투기 막는 정책을 임기 내내 했으나, 결과적으로 집값은 상승했다. 비정규직 보호법을 실행했으나 오히려 비정규직이 더 늘어났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다 중도층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중도층 입장에서 국가보안법은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 그 이유다. 결국 이념이 결부된 정책은 실패했고, 이념을 분리하고 추진한 실용주의 정책은 후대의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거친 언어가 반대층 만들어
정책적 실패 요인 외에도 노 전 대통령의 거친 언어를 간접적 실패 요인으로 꼽는 전문가도 있다. 미국정치·정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한·미FTA 같은 사안도 결국 설득에 실패한 면이 있다.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메시지를 구성하고, 정책의 맥락을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며 “노 대통령의 말은 진정성이 있었지만, 말이 정제되지 않은 측면 또한 있었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노 전 대통령의 소통 방식을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조언을 했다. 그는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정책을 설득하는 전략이 중요하다”며 “오해를 피하고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로서 실용주의적 어젠다를 잘 관철해나갔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안 교수는 “노무현이 품었던 공화주의적 가치와 이재명 특유의 탁월한 실용주의가 결합됐을 때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진영을 떠나 어떻게 제도적·문화적으로 함께 갈 것인지 고민하는 ‘공화주의적 공동체’라는 화두를 품었었다. 이재명은 정책적 실용주의자이지만, 철학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평이 있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되면 실용성 있는 공화주의 정치, 즉 현실적인 공존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안병진 교수는 경제 성장과 실사 구시가 가능하려면 ‘국민 통합’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경제는 정치고, 정치는 경제다. 결국은 국민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모이고, ‘다 같이 잘살아보세’의 에너지가 생겨야 경제 성장도 가능하다. 예컨대 IMF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은 김대중의 진보 어젠다가 아니었다. 진영 간에 서로 비판이 살아있으면서도 탄압하지 않고 공존한다면 기업도 국민도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훨씬 더 활력 있게 움직인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또한 “결국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역동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 구조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실현하는 정책은 대부분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 R&D 투자, 교육 제도, 재산권 보호, 대기업 생태계 등 바로 효과가 드러나지 않지만 꼭 필요한 기반 정책들이다”라고 분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는 평가가 많다. 사회 기득권층에서 벗어나 있고, 그들을 대통령의 자리까지 밀어올린 건 두터운 팬층이다. 언어가 거칠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며, 그 구체적인 방향으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규제는 네거티브 중심으로 변경하겠다”고 했다. 과거 민주당 정부가 꺼렸던 ‘시장주의’ ‘네거티브 규제(명시된 금지 외에는 허용하는 규제 방식)’ 등을 강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지난 5월 28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진보 정권은 기본적으로 세금을 부과한다든지, 소유를 제한한다든지 수요 억제 정책을 했다”며 “그런데 시장이 이걸 이겨내더라. 이제는 세금으로 집값 잡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한·미FTA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캠프 때부터 이 대통령의 외교통상 전략의 큰그림을 그려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도 자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양파’라고 했다. 취임식에서는 “낡은 이념은 이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자”며 “이제부터 진보의 문제란 없다. 이제부터 보수의 문제도 없다. 오직 국민의 문제, 대한민국의 문제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약속은 했다. 문제는 정책이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앞서 언급했던 페이스북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념은 이상이고, 실용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