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은 짧고 후유증은 길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국회가 이를 해제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2시간38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은 6개월째 리더십 없이 표류하고 있다. 대선 이후에도 계엄의 후유증은 어떤 형태로든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동안만 해도 미증유의 정치적 분열을 겪었음은 물론 격변하는 대외 정세에 거의 아무것도 대응하지 못했다. 계엄은 현직 대통령이 스스로 택한 정치적 파산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일을 너무 자주 겪고 있다. 2004년 이래 국회의 탄핵소추만 세 번째. 체제 자체가 갖고 있는 위험성이 드러났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 대통령제의 안정성은 이미 깨졌다.” 지난 5월 13일 만난 강원택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진단이 이랬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강 교수는 현 체제가 지속되면 실질적 민주주의가 크게 퇴조할 것을 우려했다. 헝가리나 폴란드처럼 선거만 잘 치러지는 연성독재가 눈앞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서부지법 폭동과 민주당의 사법부 압박을 보며 충격받았다”며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는 가운데 한국도 그렇게 갈까 걱정”이라고 했다. 오는 6월 3일 6공화국은 다시 한번 대통령을 뽑는다. 강 교수에게 ‘전환기의 리더십’을 물었다.
- 곧 조기대선이 치러진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먼저 짚는다면. “통합이다. 정치적 분열이나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너무 격렬해졌다. 한국인은 지금 불안하다. 국내 정치 리더십이 없었던 상황 속 대외적으로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중국은 과학기술 패권 경쟁을 펼치고 있지 않나. 국민들 스스로도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데, 이번 대선이 그런 불안을 일단락하는 선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 아니겠나. 국민을 통합할 수 있도록 포용력 있는 정치를 해야 할 것이다.”
- 다음 대통령의 역할도 그런 맥락에서 나와야 할 텐데. “‘인사’가 제일 중요하다. 폭넓게 사람을 쓴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구성할 때 총리는 물론 경제·사회 분야는 전적으로 자민련에 인선을 맡기지 않았나. 그만큼 과감한 정도의 균형, 또는 탕평 인사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좀 유능한 사람을 썼으면 한다.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정부가 유능해야 하지 않겠나.”
- 거국내각에 준하는 정부 구성을 말하나. “거국내각까진 어려워도 최대한 균형 있는, 안정감 있는 내각이 좋겠다. 균형이란 이념적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정감이란 지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처럼 검증되지 않은 정책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국민이 불안해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런 내각을 꾸려야 하고, 내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인사에 너무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우리 대통령직이 어느 순간 갈등의 아이콘이 됐다. 어느 시점부터 이렇게 됐나.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부터다. 결정적으로 한국 사회가 양극화된 것은 문 정부 시절의 ‘적폐청산’과 관련이 있다. 내 경쟁 세력이 적폐라는 건데 정치적 경쟁은 다름의 문제지 선악 구도가 아니지 않나. 다음 대통령은 어느 쪽이든 그런 일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사법절차가 진행되는 상황이니 더 이상 이를 확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전환기적 리더십을 가장 잘 보여준 대통령은. “여럿이 있겠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을 한번 보자. 그와 김영삼·김대중은 그야말로 적 아니었나. 군사정권의 핵심과 민주화운동의 거두들이었으니. 하지만 6·29선언으로 타협을 하고 그다음 체제로 넘어오자 화해와 협력을 유지했다. 노 전 대통령이 ‘참용기’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나.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고. 정말로 그는 국회 개원식부터 갔다.”
- 여소야대가 된 1988년 13대 국회 말인가. “맞다. 노태우 정부에서 7차례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가 있었는데, 그게 민주화 이후 윤석열 정부 전까지는 제일 많았다. 그런데 일곱 번 중에 세 번은 거부권 행사 뒤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거다. 여소야대의 상황이 꼭 극단적 대립으로 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노태우 정부 이전(5공화국)은 정말이지 선악 구도로 정치를 하던 시절 아니었나. 국면이 바뀌면서 노 전 대통령과 양김이 전혀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보여준 거다. 지금 묻고 싶다. 그때만큼 우리가 더 적대적일 수 있나?”
- 감정적으로는 그만큼 적대적인데. “비판과 공격을 하면서도 기본적인 틀에서는 정치지도자들 간의 신뢰가 있어야 하지 않나. 만약 다음 정부도, 대통령도 되었고 입법부도 많은 의석을 갖고 있으니 마음대로 하겠다는 식이라면 다시 갈등의 정치가 반복되는 것이다.”
- 일종의 기사도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런 당위적 얘기보다는… 정부가 5년 내내 마음대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500만표 넘는 격차로 대선을 이겼다. 직후 치러진 총선도 범여권이 과반을 훌쩍 넘었다. 민주당은 80석을 간신히 넘겼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겨놓고도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렸다. 권력을 실제로 잡고 나면 생각보다 취약할 수 있다는 거다. 당장 내년에 지방선거가 있다. 여당이 서울, 경기도에서 지면 대통령 리더십이 약화될 것 아닌가. 실제로 권력을 갖게 되면 국민은 책임을 묻는다.”
- 3자 구도가 된 이번 대선 후보들에게 그런 대국적 정치의 가능성이 보이나. “세 후보들이 분열과 갈등을 수습하는 리더십을 보이겠다는 걸 명료히 했으면 한다. 다들 지치고 피곤하다. 대외적으로도 그렇지 않나. 대행도 대대행도 탄핵되는 굉장히 웃기는 상황이다. 국내적 지지를 골고루 받는 안정감을 가진 대통령이라야 밖에서도 신뢰받는다. 큰 틀에서 정치를 봤으면 한다.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리더가 이해하고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YS는 문민정부라는 시대적 요구를 하나회 척결 등 행동으로 옮겼다. DJ는 외환위기를 풀어내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갈등과 분열을 푸는 게 시대적 과제다.”
- 내란에 대한 적폐청산이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럼 그다음 권력을 잡은 쪽은 또 보복할 것이다. 악순환이 지속될 거다.”
- 탄핵 정국에서 유독 사법부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졌다. 민주당도 이재명 후보에 대한 유죄취지 파기환송 이후 연일 사법부를 압박하는데. “서부지법 난동이 있었을 때 굉장히 충격받았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흔드는 일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에 불복해 미국 의회 의사당에 난입했던 사건처럼. 결국 ‘내 뜻대로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는 거 아니었나. 지금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하든 독립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서부지법 폭동도, 헌재 판결을 앞둔 보수단체의 집회도, 민주당의 대법원 공세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잘못된 거다. 사법부는 그냥 사건이 있으면 판결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 타이밍이 선거를 앞두고 예민하다고 해도 사법부를 압박하고 위태롭게 만드는 식의 불만 제기는 위험하다.”
- 민주주의의 안정성 차원에서 평가해달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나라들을 보면, 의회 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사법부를 장악하는 것이다. 헝가리는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확 낮췄다. 그러면 법관들 퇴직이 늘 것 아닌가. 빈 자리에 내 편을 집어넣는다. 폴란드도 비슷했다. 우리 대법 판결이 있고 나서 민주당이 대법원 판사를 30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굉장히 걱정이 됐다. 헝가리, 폴란드가 했던 일이다. 이러면 삼권분립이 깨진다.”
- 사법부를 건드리면서 연성독재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정권이 교체되면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이러면 체제 자체가 권위적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대법원장을 청문회에 부르는 것도 기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전례도 없고 외국도 그러지 않는다. 인사청문회 때나 하는 것이지. 판결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법부는 존재가치가 없다.”
- 안 그래도 지금 정부·여당이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추천권을 상당부분 가지고 있는 셈인데. “사법부가 기왕 정치적 관심을 받았다면 중립성을 높여주는 방안으로 제도를 개선하면 된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관은 국회의원 3분의2 동의로 임명하는 식이다. 여당 몫, 야당 몫 같은 건 없애버리고. 국회의원 3분의2가 동의하려면 무난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될 거 아닌가.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방식도 없애고, 법원 내부에서 추천하는 등의 형태로 가야 한다.”
-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가 됐다 퇴행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우리도 비슷하게 갈 수 있어 걱정된다. 그런 나라들이 선거는 제대로 치른다. 그런데 제도적인 형태의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행정부가 마음대로 다 하는 것이다. 행정부가 입법부까지 장악해놓고, 만든 법이 이상해도 사법부가 역할을 못 한다. 그러면 그게 무슨 민주주의인가.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사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살아있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 우리는 20년간 탄핵을 세 번 겪었다. 대통령의 리스크인가 대통령제의 리스크인가. “대통령제의 리스크다. 대통령제는 내각제와 달리 임기가 보장된다는 게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게 중간에 끊어지게 되면 대통령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미국은 지금까지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이 한 명도 없다. 뭐 미국 정치는 항상 좋기만 했겠나. 그런데 우리는 20년간 세 번의 탄핵소추를 겪고 두 명은 실제로 물러났는데… 이제는 대통령제의 안정성이 깨진 것 아니겠는가?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탄핵시키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국민 모두가 그럴 것이다. ‘중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그때 한번 확 바꿔가지고 탄핵시키면 되겠네’ 하는 것이다.”
- 국민 인식 때문에 대통령제를 그만해야 한다는 것인가.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거기에 기반하는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너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탄핵 국민행동’ 같은 게 생겼다.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또 비슷한 일이 생길 거다. 만약 이번 대통령도 3~4년 하다가 물러난다면 이 시스템은 끝난 것이다. 왜 이런 제도를 유지하나? 실패의 비용은 국민이 다 지고 있지 않나. 대통령의 권위도 굉장히 떨어진 상황이다. 큰 정치인의 카리스마나 권위, 말 한마디가 갖는 무게감… 그런 것이 이제 없다. 대통령이 쉬워진 거다. 분단국가에서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갈등의 정점에 있고, 단임제 대통령이 국가의 장기적 과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나라가 몸뚱이는 커졌는데 옛날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 어떻게 바꾸면 되나.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고, 총리 중심 내각이 실질적 정책을 집행한다. 대통령은 정무적으로 총리와 내각을 견제하고 필요하다면 인구나 기후위기 등 장기적 과제를 책임진다. 야당 총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재밌는 게 요즘 장관들, 일할 만하다더라. 용산에서 전화가 안 오니까. 그러고 보면 장관들에게 제 역할을 맡긴다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때는 개별 부서의 자율성이 많이 사라졌었다. 국정 철학에 맞는 장관이라면 좀 맡겨야 한다.”
- 프랑스식 이원집정제에 가까운 형태인가. "그냥 분권형 대통령제라고 하자. 행정부 안에서 권력을 나눠야 한다. 사실 그 방법밖에 없지 않나. 개인적으로야 내각제를 선호하긴 하지만 국민들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고 싶어 한다. 위기 상황에는 대통령이 통수권을 발휘하는 것도 좋은 점이고. 중간 단계 차원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형태로 가면서, 중앙과 지방정부 권한을 정확히 배분해야 한다. 부통령제는 어렵다. 권력 누수가 생기니까. 국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것이 낫다."
- 탄핵은 헌재가 하는 것이 맞나, 미국처럼 의회가 하는 것이 맞나. “미국 상원의 기능을 헌재가 하는 셈인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헌재도 정무적 판단을 하잖나. 결국 문제는 그 구성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 하나 문제는, 탄핵도 탄핵이지만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문제를 헌재로 가져간다는 거다. 정치의 사법화가 과도하다. 타협을 통한 정치의 범위가 더 큰데 정치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대통령이 여당 공천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데 현실적으로 맞는 건가? 총선에서 지면 그 책임은 대통령이 다 지는데.”
- 하지만 대통령의 여당 장악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표적 단면 아니었나. “3김 시대의 역작용으로 만든 게 ‘당·정 분리’인데 그건 좋다. 하지만 사법부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란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공천개입으로 유죄가 나오지 않았나. 내가 보기엔 법 이전에 정치의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다음 정권에서는 정치가 복원됐으면 좋겠다.”
-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의 필요성은. “필요하다. 2차 투표에서 50% 이상을 득표해야 당선되니, 대통령의 정통성이 강화된다. 인위적 단일화 등 정치공학적 접근도 줄어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당제가 될 것이다. 개헌할 일은 아니다. 여야가 합의하면 선거법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 비용 문제는 핑계다.”
-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자는 게 국민 여론인데. “의원 정수는 늘려야 하는 거다. 자본주의가 성공한 까닭은 경쟁자가 계속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정치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정책과 임무를 내세울 수 있는 집단이 등장해야 기존 정당들이 긴장한다. 우리는 독과점이다. 중앙에서 보면 과점, 각 지역으로 내려가면 독점. 비례 국회의원을 50명가량 늘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다당적 구도가 된다. 그럼 한 정당이 과반을 얻기 어렵고, 타협과 양보의 정치가 필요해진다. 그러면 많은 정치가 바뀔 것이다. 결국 지역구 의원을 줄이거나 비례의원 수를 좀 늘리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역구 의원을 줄이는 것보다는 나라를 하나 새로 세우는 게 쉬울 것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