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2007년 치러진 대선에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의 외곽조직인 ‘정통’(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의 핵심인사였다. 당시 정통의 조직력이 정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직 동원 과정에서 이 후보는 ‘차떼기’ ‘박스떼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후보의 전방위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 후보는 500만표 차 이상으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지금도 이 표차는 역대 대선 가운데 1위와 2위 간 표차 중 가장 큰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후보는 18년 만에 직접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 이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사실 공식선거운동이 열리기 전인 지난 5월 10일까지도 이번 대선에서 가장 많이 소환된 건 2002년 대선이었다. 이회창 대세론 속에서 지지율이 크게 밀렸던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썼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줄곧 공고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모델을 ‘1강 다약’ 구도를 반전시킬 카드로 봤다. 하지만 국민의힘 지도부의 무리한 단일화 시도는 당원들의 반발을 사면서 결국 무위로 끝났다.
김문수 후보와 한덕수 당시 무소속 대선 예비후보 간의 단일화 실무협상이 결렬되자 지도부는 지난 5월 10일 새벽 비상대책위원회와 당 선거관리위원회 회의를 열어 김 후보의 대선 후보 선출을 취소하고, 한 후보의 입당과 후보 등록 안건을 순차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후보 교체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행한 전 당원 투표에서 한덕수 후보 지명을 위한 변경 안건은 과반 동의를 얻지 못해 부결됐다. 이에 김 후보는 대선 후보 지위를 회복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했다.
김문수 후보 캠프 관계자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며 “지도부의 핍박이 오히려 김문수 후보에게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단일화를 둘러싼 김 후보와 지도부 간의 갈등은 김 후보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제 본선이 남아 있다. 김 후보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겨룰 만한 경쟁력 있는 후보인지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대선이 17대 대선과 비슷한 구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왜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진 2017년 대선이 아니라 2007년 대선이 소환되는 것일까.
전직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17대 대선과 지금이 비슷한 점은 ‘국민의힘 후보는 어떻게 해도 당선이 안 될 것 같다’와 ‘국민의힘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두 가지”라고 지적했다. ‘정권 심판론’에 더해 ‘인물론’에서도 밀린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였던 2007년 ‘정권 교체’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당시 여권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에선 ‘친노무현’(이해찬·한명숙·유시민) 진영과 ‘비노무현(손학규·정동영)’ 진영이 경선 규칙 등을 둘러싸고 진흙탕 싸움을 했다.
홍준표 “정동영 대선 같다”
이번 대선에서 당내 경선에 참여했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나는 2002년 ‘노무현 대선’을 꿈꾸는데 다른 사람들은 2007년 ‘정동영 대선’을 하는 것 같다”는 언급은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1차 경선에 참여한 후보는 8명이었는데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찬탄)파’와 ‘탄핵 반대(반탄)파’의 대결 구도 양상이었다. 일종의 친윤 대 반윤 프레임이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집권당 내부의 권력 지형 차원으로 봤을 때 2007년은 민주당이 가장 분열적인 상황이었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자기 당 후보인 정동영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지금의 국민의힘도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미국으로 가고 한동훈 전 대표도 김문수 캠프에 합류하지 않는 등 분열적인 상황이며, 김문수 후보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택한 후보도 아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1149만2389표)는 정동영 후보(617만4681표)를 531만7708표 앞서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후보(48.67%)와 정 후보(26.14%) 간 득표율 차이는 22.53%포인트에 달했다. 당시 투표율은 63%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는데 이 같은 배경으론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후 진행된 대선에선 투표율은 늘 75%를 웃돌았다.
앞선 민주당 관계자는 “완전 자포자기 상태였다.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흥이 안 났고 똘똘 뭉치지도 못했다”고 회상하며 “당시 20대 투표율이 특히 낮았는데 이들이 나왔더라면 해볼 만하지 않았을까”라고 지적했다. 실제 17대 대선의 20대 유권자 투표율은 46.6%로 40대 이상이 72.4%인 것과 비교할 때 젊은층의 정치적 관심 저조가 두드러졌다. 30대 투표율도 55.1%에 그쳤다.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약 400만명의 20대가 정 후보에게 표를 줬다면 역대 최대 득표율 차로 패배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투표장 안 나오는 보수 늘어날까
2007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에서도 ‘무력감’을 느낀 보수 지지층이 투표장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치러지는 만큼 애초부터 국민의힘에 불리한 대선인데 단일화를 둘러싼 내홍까지 겪으면서 당원들의 정치 혐오와 당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보수층 유권자들은 이번 김문수 후보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 간 단일화 과정에서 느낀 실망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국내 항공사 한 임원은 “이놈도 저놈도 다 꼴보기 싫다”며 “투표날 가족들하고 일본 가려고 비행기표를 잡아놓았다”고 말했다. 전직 대기업 임원 역시 “둘이 저렇게 싸워서 끝난 게임”이라며 “투표 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중도라 말하면서도 ‘이재명 후보는 절대 찍을 수 없다’는 40대 한 외국계 기업 부장급 인사는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의사표현 방식”이라며 “이번 선거는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보수 성향에 가까운 중도층 내지 보수층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연령별로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20~30대 유권자들 사이에서 투표장에 나가도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크다. 국민의힘 당원인 20대 김모씨는 “보수 정당이 한 번 말아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느냐”며 “원래 한동훈 후보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당원투표와 국민 경선으로 뽑힌 김문수 후보를 새벽에 교체하는 걸 보고 정이 털렸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당의 체면을 깎아먹은 것이 화가 난다”며 “투표를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밝힌 직장인 이모(34)씨도 “이번 선거는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아니냐”라며 “투표하러 가는 시간도 아깝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민주당은 안 좋아하고 이재명은 싫어하는데 김문수 후보는 극우라서 뽑을 사람이 없다”며 “단일화 과정에서 잇속만 챙기려는 모습을 보여준 국민의힘에 실망했다”고 했다.
다만 이념적으로 볼 때 전통적 보수층이나 연령별로 60대 이상의 고령층 유권자들이 실제로 투표장에 나가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역대 선거를 봐도 이들의 실제 투표율은 항상 높았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 때와 다른 점 역시 여기에 있다. 당시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층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20대와 30대 유권자들이었다. 즉 지난 대선에서 윤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20대와 30대 남성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거나,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를 지지할 경우 1위와 2위의 격차는 17대 대선 때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분석에 대해 민주당 측은 손사래를 친다. 자칫 이런 기대감이 오만함으로 비쳐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재명 후보도 지난 5월 14일 “지금 (선거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분도 있지만 결국은 아주 박빙의 승부를 하게 될 것이란 게 제 예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에서 말하는 압도적 대선 승리의 구체적 기준은 무엇인가’란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의 목표는 압도적 승리가 아니라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라며 한발 물러선 입장을 드러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보수 진영 내의 한동훈 지지층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거나, 이준석 후보 쪽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며 “김문수 후보가 한덕수와의 단일화를 내세우면서 최종 경선에서 한동훈을 이겼는데 단일화는 엎어지고 정당은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여주지 않았나”라고 설명했다. 보수 지지층의 분열로 국민의힘 후보의 득표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뉴스1이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5월 12일부터 13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지난 14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은 51%, 김문수 후보는 31%,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8%를 기록했다. 정치 성향별로 보면 보수 진영에서 김문수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60%였다. 국민의힘 최종 경선에서 한동훈 후보의 당원투표 득표율이 38.75%였던 것을 고려하면 한동훈 후보 지지자나 찬탄파를 김 후보가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분열된 보수 지지층이 이준석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김문수, 찬탄파 흡수 가능할까?
장우영 교수는 “김문수 후보가 되면서 한동훈이 선대위에 참여하지 않고, ‘빅텐트’를 했어야 할 이낙연 전 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연쇄효과가 일어나고 있다”며 “이 전 총리는 내란 동조 세력과 선거 연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탄핵 찬성파들의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계엄과 탄핵에 대한 명확한 입장 정리를 해야 한다”며 “그래야 한동훈 전 대표의 선대위 참여 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가 중도 확장을 하지 못하면 이준석 후보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장 교수는 “이준석 후보는 2007년 대선 당시 문국현 후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며 “중도 싸움에서 김문수 후보가 실기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준석 후보가 중도층을 흡수해 지지율이 15~20%정도 나오면 단일화 승부를 봐야 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