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강성 지지층 결집에 고무된 모습이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중도층의 여권에 대한 민심은 싸늘하다. 만약 대통령 탄핵이 인용돼 조기 대선을 치를 경우 강성 지지층에만 끌려다닌 여당이 대선 승부처인 중도 표심 공략에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혼란 속에서 당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꾸준히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이다. 지난해 4·10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위기론’이 대두될 때도, 12월 비대위원장 인선을 둘러싼 난항이 이어질 때도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원조 개혁보수’로 불리는 그는 보수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유 전 의원이 그간 개혁 보수를 고집하면서 당내에서 겪은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에게 족쇄처럼 따라다니는 ‘배신자’ 프레임이 늘 발목을 잡는 것도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개혁과 ‘공화(共和)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아온 유 전 의원은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따뜻한 보수’로 규정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우클릭 행보에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날카롭게 응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정치 철학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간 진보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가치를 보수가 더 넓게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보수 정당 안에서 이것을 설득하는 게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죠.” 지난 3월 4일 여의도에서 만난 유 전 의원은 합리적 보수의 길이 외롭고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음은 유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
- 오랜 시간 ‘합리적 보수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데 “국민들이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는 믿음의 배경은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에게 맞춰야지, 국민들이 따라올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요즘 계몽이라는 말이 유행인데, ‘내가 국민을 계몽해서 다 바꿔보겠다’ 하는 것은 과한 생각이다. 그러나 여론만 좇아 여론에 영합하는 정치도 개혁을 하기에 굉장히 부족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25년간 해오면서 제 화두는 ‘내가 왜 정치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듯, 아무리 욕을 먹어도 진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치다. 정치인은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여론만 좇아가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저는 끊임없이 국민들을 설득하고 좋은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때에 따라서는 한두 발짝 먼저 가다 보니 공천 때마다 잘리고, 원내대표 하다가 쫓겨나는 식으로 괴로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현실 정치에서 외롭고 힘든 순간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보수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하면서 ‘개혁 보수’를 이야기할 때,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확신과 신념은 분명히 있었지만, 동료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국민들을 충분히 설득하는 책임을 다 했느냐 스스로 물어보면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부분은 부족했다.”
- ‘따뜻한 보수’라는 정치 철학이 왜 나온 것인가. “정치를 하면서 헌법 정신을 고민하게 됐다. 헌법을 수도 없이 읽었다.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있는 ‘민주공화국’의 공화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했다. 헌법에는 여러 가치들이 녹아 있는데 그 가치들을 균형 있게 지키는 것이 공화주의다. 공화 안에는 사람들을 잘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뒤처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사회복지를 하는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제가 그 공화라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고,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인 공화주의를 완성하는 것이 보수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5년 원내대표로서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할 때도 제가 고민했던 것들을 연설에 반영했고, 2011년 전당대회에 나갔을 때에도 그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제 주장은) 자유와 반공, 시장경제만 강조하던 과거의 보수 정치하고는 결이 달랐다. 저는 ‘우리 보수가 그보다 더 넓게 헌법의 가치를 쓰자’는 거다. 헌법에는 자유도 있지만 평등도 있다. 사람들이 ‘진보의 가치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는 공정과 정의, 인권, 생명, 평화 같은 가치도 있다. 진정한 보수는 헌법의 가치를 선택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게 공동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보수다.”
- 지난 3월 3일 여당 지도부의 박근혜 전 대통령 예방은 어떻게 봤나. “언론에 공개된 메시지만 봤고, 다녀온 사람들에게 속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 전 대통령이 과거 탄핵 당시 탄핵소추위원장이던 권성동 원내대표에게 ‘지나간 일인데 너무 개의치 말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말씀하신 거다. 마치 저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또 박 전 대통령이 여당의 단합과 통합을 이야기하신 것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당내 여러 찬반 의견이 있지만 단합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싶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탄핵에 대한 찬반이지 않나. 12·3 비상계엄 직후부터 저는 일관되게 ‘찬반에 관계없이 사태가 정리되고 나면 뭉치자’고 말했다. 헌재 결론이 나면 다시 호소할 것이다. 탄핵에 대해 당내 찬반 의견이 갈려 있지만, 우리 당이 단합해 후보를 낼 수 있을지가 제일 관건인 것 같다.”
- 과거에도 “탄핵의 강을 건너자”고 말한 바 있는데, 현 상황을 보면 ‘탄핵의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2019년에 처음 그 표현을 썼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이 합당할 때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다시 보수를 통합하는 마당에 탄핵 이전의 상태에서 내부 분열을 하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탄핵의 강을 건너는 것이 어려운 과제가 됐다. 이번에는 8년 전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학습 효과와 ‘이재명 포비아’가 합쳐지면서 과거보다 보수가 결집하고, 탄핵 반대 집회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이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승복하지 못 할 사람들이 양쪽 끝에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거쳐 온 과정을 보면 헌재가 흠결도 많았다. 때문에 헌재의 결정문은 다수 국민들이 ‘이 정도면 승복하겠다’고 납득할 수 있도록 깊은 고민 끝에 나와야 한다.”
- 윤석열 대통령의 최후변론은 어떻게 봤나. “‘헌재 결정이 어떻게 나더라도 승복하겠다. 국민들께서도 헌재 결정 이후에는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승복해 달라’는 메시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승복에 관한 메시지가 전혀 없어 실망했다. 그간의 변론 기조를 유지하고, 오히려 기각돼 돌아가면 개헌을 하겠다며 개헌 이야기를 꺼냈다. 직무정지 상태이지만 대통령으로서 국민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지 않았다. ‘혼란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은 했는데, 계엄과 내란 혐의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반성과 사과는 없더라도 승복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라가 두 쪽 나는 것과 직결되는 것 아닌가. 우리 당에서 지난 3·1절 집회에 참석해 ‘헌재를 쳐부수자’라는 발언이 나온 것은 정말 잘못된 거다. 지난번 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보면 선동하던 정치인들 중 구속된 사람이 없었다. 반면 현장에 가서 폭력을 행사한 젊은이들은 구속되고 고생하고 있다. 선동한 정치인들의 책임이 더 크다.”
- 탄핵 심판 결정 이후 조기 대선 출마 여부를 밝힐 것이라고 들었다. “마지막 남은 저의 정치 목표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돼서 경제와 안보를 튼튼하게 살리는 거다. 그것을 위해 평생을 준비해 왔다. 이재명 대표 같은 사법리스크에 걸리지 않으려 깨끗하게 정치해왔고, 평생 경제 전문가였고, 국회에 와서는 외교·안보 쪽에 약하다고 생각해 국방위원회에 8년간 있으면서 국방위원장까지 했다. 누구보다 준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겪어 보니 우리가 얼마나 황당한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는지 알게 됐지 않나. 저는 지난 대선 경선 때부터 ‘윤석열 후보는 준비가 안 된 사람이고, 검증이 안 된 사람’이라고 공격했었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게 다 맞았다. 그런 면에서 저는 준비가 되고 철저히 검증을 받았다. 그러나 출마 의사는 아직 밝히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다. 출당, 제명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 불과하다. 우리 당 후보들은 탄핵 심판 이후 당 지도부가 경선 계획을 밝히면 그때 출마 의사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여당 후보에게는 아주 어려운 선거가 될 것 같다. “만약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이번 대선은 2017년 대선과 비슷하게 우리에게 불리한 선거가 될 것이다. 우리는 10%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으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가 확정적인 반면, 우리 당에는 다양한 후보들이 있지 않나. 몇 명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후보들 스펙트럼이 넓다. 후보들 중에 강경 보수가 있고, 국민들 보시기에 ‘저 정도면 합리적인 보수다’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떤 후보를 뽑느냐가 가장 중요한 대선 전략이다. 국민들 입장에서 우리 당을 봤을 때 김문수 장관이 후보가 되는 것과, 저 같은 사람이 후보가 되는 것은 굉장히 달리 보일 것이다. 또 민주당은 후보 선출 과정이 단순하고 뻔하지만, 우리 당은 경선 과정에서 국민들 앞에서 각자의 생각을 밝힐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드라마틱하게 경선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 눈에 ‘이재명보다 차라리 저 사람이 낫겠다’라는 생각만 들게 한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 한동훈 전 대표와의 연대 가능성이 거론됐는데. “모든 분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열려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 특정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저는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 한 전 대표의 철학을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윤 대통령이 처음 당에 왔을 때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다. 윤 대통령과 오랫동안 일을 했고, 평생 검사를 하다 정치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대표의 정치 철학이 굉장히 궁금하다. 앞으로 검증될 부분이라고 본다. 제가 2021년 경선 때 첫 TV토론에서 윤 대통령에게 ‘당신은 왜 정치를 하느냐,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윤 대통령은 ‘국민이 원해서’라고 답했다. 그때 충격을 받았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는 만큼, 무거운 책임을 자각하고 내가 진짜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어야 한다.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한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 생각이 아주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이 원해서’라는 대답은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잘 나오니 나왔다는 것 아닌가. 그때 ‘이 사람은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하는 치열함과 어려움을 하나도 모르고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훈 전 대표는 ‘국민 눈높이’를 말하는데, 그게 여론조사를 따라가겠다는 것인지, 국민 눈높이라는 게 있다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지, 만약 그것이 국민 눈높이와 다를 때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한 전 대표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