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 국면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헌’은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걸기 위한 좋은 카드다. 우선 ‘87년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개헌을 내세울 명분이 충분하다. 특히 여당 차기 주자 입장에서는 여론조사에서 40% 안팎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견제책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민주당 지도부와 이 대표가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만 할 수 있는데, 이 대표만 말하지 않는’ 개헌 이슈는 조기 대선을 관통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월 12일 국회에서 개헌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오 시장은 “1987년 헌법체제 극복의 핵심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계를 허물고 지방정부로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데 있다”며 “입법·행정뿐만 아니라 세입·세출 권한까지 이양하는 과감한 지방분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제기되던 4년 중임제 등이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을 5개의 초광역 경제권으로 나누는 ‘5대 강소국 프로젝트’를 제시해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세 과시한 오세훈의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

이날 행사에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김상훈 정책위의장, 이양수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와 40여명의 현역 의원들이 자리하면서 오 시장이 세력화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오 시장은 기자들에게 “개헌 토론회를 대선 행보와 연계해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며 “지금은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그 결론이 난 다음에 조기대선에 대한 논의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앞서 오 시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서 이재명 대표를 겨냥해 “홀로 개헌 논의에 귀를 막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월 3일 기자회견을 열고 2026년 지방선거 실시와 함께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안했다. 안 의원은 권한축소형 대통령 4년 중임제, 장관·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 요건 절차 세분화, 국민 기본권 확장 등을 개헌안으로 제시했다. 또 다른 여권 잠룡인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이 제대로 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개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시사저널’ 인터뷰에선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상·하원 양원제 등을 모두 거론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원칙적으로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구상을 밝힌 적은 없다. 한 친한계 인사는 “(한 전 대표가) 국가 운영 등에 대한 어젠다를 밝힐 필요가 있을 때 개헌에 대한 입장도 당연히 밝히지 않을까 싶다”며 “통치 구조 개편뿐만 아니라 헌법 전문에 시대정신을 수록할지 여부도 개헌의 일부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다음 대통령의 임기는 3년으로 해 개헌과 선거법 개정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조기 대선 정국에서 대권 주자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 게 아니라 ‘차기 대통령 3년 임기단축’을 포함한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조기 대선 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과 국회 둘 다 권력을 제한하고 분권, 감시, 견제,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선호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은 지도부 차원에서 개헌론 띄우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개헌이라고 확신한다”며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고, 제왕적 의회의 권력 남용도 제한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최근 당 개헌특위 위원장에 6선의 주호영 의원을 내정했으며 자체 개헌안도 만들 계획이다. 다만 여당은 의원내각제 형태의 개헌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당내 의원들은 대통령제의 체제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며 “(대통령제라는) 틀 안에서 의회의 권한 수준을 어느 정도로 둘 것이냐는 차원으로 (개헌)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선 ‘신 3김’이 앞장서 개헌 주장

민주당에서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부겸 전 국무총리,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잠재적 대권 주자로 꼽히는 ‘신(新)3김’이 개헌의 필요성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역시 개헌을 주제로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거는 모양새다. 김동연 지사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탄핵 전에 주요 정치주체들이 개헌에 ‘선(先) 합의’ 해야 한다”며 “분권형 4년 중임제로 개편하고 다음 대통령의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2028년 총선과 대선을 함께 치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 같은 제안은 김두관 전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말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개헌안과 일맥상통한다. 김 전 의원은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지방 소멸을 막는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겠다”며 “개헌을 통해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2028년까지 3년으로 단축하고 중임할 수 있도록 단서조항을 만들자”고 했다.

김부겸 전 총리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개헌안에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 분산, 여소야대 국면에서 대통령과 국회 간의 갈등 해소 방안 등이 들어가야 한다”며 “주요 대선 주자들이 국민들에게 개헌을 약속하고 빠르면 내년 지방선거, 늦어도 다음 총선 전까지는 개헌을 매듭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수 전 지사는 자신의 SNS에서 “내란 이전에는 대통령제, 책임총리제, 내각제와 같은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 개헌의 주요 쟁점이었지만 내란 이후는 불법적 계엄을 어떻게 원천적으로 방지할 것인지가 더 시급한 과제가 됐다”며 “이에 더해 대통령의 권력을 어떻게 분산시키고,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강화할 것인지도 함께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는 개헌에 대해 민주당이 소극적일 이유가 없다”며 이 대표를 향해 ‘개헌 추진에 앞장서 달라’고 촉구했다.

이같이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분출함에도 이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가 개헌에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 자문위원이었던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력 대권 주자일수록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헌에 소극적”이라며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현실화돼서 대선 승리를 담보할 수 없을 때만 (민주당이) 룰을 바꾸기 위해 개헌을 내걸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내란 극복에 집중할 때”라며 개헌론에 선을 긋고 있는 이 대표가 끝까지 개헌론에 침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한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탄핵 여부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개헌을 얘기하는 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했지만 “개헌 얘기를 (지도부가) 꺼내면 지지자들로부터 ‘비상 상황이 수습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비판받을 여지가 커서 개헌 얘기를 안 꺼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 민주당 전직 당직자도 “민주당 지지층이 개헌 얘기를 탐탁지 않아 한다”면서 “탄핵이 인용된 후에야 대선 공약을 다듬는 과정에서 개헌이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이 대표의 지지율이 답보 상태이거나 이전 대선처럼 상대 후보와 1%포인트 이내의 차이를 보이게 되면 막판에 1년 임기 단축 후 총선과 대선 시기를 맞추는 개헌안까지도 꺼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 공약 안 하면 결격사유 될 것”

정치권에선 조기 대선이 가시화됐을 때 개헌은 ‘득표율을 높이는 플러스’ 역할보다는 ‘안 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카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많다. 차기 주자가 개헌 공약을 내지 않으면 일종의 결격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민주당 전직 당직자는 “모두가 개헌론을 제시하는 상황에서 (개헌 공약을 내걸지 않으면) 상대 후보에게 미래 세대를 위해 뭘 하겠냐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며 “표를 잃지 않기 위해, 다른 후보에 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모든 후보가 개헌을 공약으로 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멱살을 잡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재명 대표가 결단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개헌은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개헌은 주요 정치 세력이 의결해야 가능하다. 국회 본회의에 올라갈 개헌안을 누가 만들겠나. 이재명 대표가 개헌에 앞장서면 된다. 그동안 논의된 개헌안도 많아서 개헌특위를 만들고 두 달이면 논의가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개헌 대신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꺼내들었다. 개헌 안 하겠다는 소리다.”

진정성 없는 개헌 논의가 공염불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진아 교수는 “국민투표법 14조 1항은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효력이 상실됐기 때문에 개헌하려면 국민투표법부터 개정해야 한다”며 “2017년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에서도 지적된 부분인데 아직도 개정되지 않았다는 건 개헌에 진심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헌재는 2014년 7월 재외국민 투표인명부 작성 조항에 대해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재외국민이어도 국내에 거소 신고가 돼 있어야 투표인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한 조항이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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