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서 보수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는 위기감이 크다. 보수 정체성 자체가 무너져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는 냉혹한 평가도 나온다. 진보의 포퓰리즘에 맞장구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위기의 보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길을 택해야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시급한 과제를 원로와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 찾아본다.
지난 5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개혁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적을 많이 만드는 일”이라며 “뭔가를 빼앗기는 쪽에서는 정말 정권 퇴진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교육·노동·연금·의료 4대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나왔다. 4·10 총선 이후 야권 일각에서 ‘정권 퇴진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개혁 의지를 밝힌 것으로 특히 이날 윤 대통령은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이날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만난 ‘노동운동가’ 주대환 민주화동지회 운영위 의장은 윤 대통령의 개혁 기치에 대해 “늦었지만 매우 잘된 것”이라며 “총선에서 패했어도 대통령은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주 의장은 특히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역대 정권은 구조개혁을 미루고 미루어 오늘의 상황까지 왔다”며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개혁을 일관성 있게,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면 지지 세력이 결집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두려움 없이 멀리 내다보고 국민을 믿고 전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혁 과제 중 하나인 ‘연금개혁’을 추진하면 저항이 클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더 내고 덜 받게 개혁’하자고 하면 엄청난 저항이 생길 것 같지만, 국민들도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보수의 위기’ 원인에 대해서는 “보수가 궁지에 몰리는 것은 이른바 좌파의 선동 때문이라기보다는 보수 자신의 무능 때문”이라며 “대한민국은 원래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 나라’다. 잘난 놈이든 못난 놈이든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대한민국 재건”을 주문했다.
- 총선에서 패배한 윤석열 정부가 길을 잃었다는 말이 들린다. "지난 5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25번째 민생토론회는 늦었지만 매우 잘된 것 같다. 국민의례와 장관 발표도 생략하고 마루공과 봉제공, 대리운전 기사와 배달 운전자들의 이야기를 대통령이 직접 들은 건 참 잘한 일이다. 진작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성격에도 맞는 것 같다."
- 여소야대 정치 환경 속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아주 독특하다. 한국 민주정은 현대에서 '아테네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민주정이 아닐까 싶다. 시민들이 대의원을 선출해놓고도 위임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북유럽, 독일 사람들이라면 투표하고 나서 정당과 의원들에게 맡겨놓고 지중해로 휴가를 간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발소에서도 목욕탕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하고 정치인을 욕한다. 언론도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래서 총선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정치인과 정당들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대통령도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
- 한국 민주주의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대통령의 역할도 특수성을 가질 것 같다. "한국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당도 발달하지 않았다. 당원과 일반 국민의 경계선이 애매하다. 당원이라고 해도 강령을 읽어보거나 당원 교육을 받고 정책 토론에 참여한 사람은 드물다. 그저 친구나 친척이 공직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여 입당 원서를 써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든 누구든 국민을 직접 상대하여 정치를 해야 한다.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만 잘하면 여소야대의 상황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본다."
- 윤 대통령은 지난 14일 민생토론회에서 '개혁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적을 많이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마음속에 개혁에 대한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 발표를 보면 소득 상위 10% 혹은 자산 상위 10%에 속하는 사람 중에서 각각 71.1%, 78.4%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겨우 3%만이 자신을 상층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 즉 상위 10%가 매우 강력한 사회적 발언권과 문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언가 양보해야 할 기득권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역대 정권은 이들을 무서워하여 구조개혁을 미루고 미루어 오늘의 이런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 박근혜 정부도 공무원연금 개혁에 손을 대다가 무너졌다는 분석도 있다. 그만큼 상위 10%의 조직된 힘이 강력하지 않은가. "그렇다. 상위 10% 또는 20%는 진영을 떠나 존재한다. 진보 진영에도 노동조합이나 여타의 사회적 네트워크로 강력하게 조직된 상층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구조개혁을 가로막아온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우리 사회 내부에서 극도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고 본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말기 히틀러의 나치가 득세하기 전과 비슷한 상황은 혹시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럴 때 히틀러 같은 정치가가 나타나 선동하면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갑자기 커질 수 있다. 그만큼 소외된 이들의 좌절감이 쌓이는 상황이다. 요즈음 20~30대 청년들이 만만한 상대인 또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도 예사롭지 않다."
- 그러면 정부로선 더 위험한 상황이고, 더 길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바로 80%의 서민, 하층 노동자와 청년들을 지지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스 민주주의가 전성기에 이른 것은 바로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후,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로 참전했던 가난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던 때였다. 개혁을 일관성 있게,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면 지지 세력이 결집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두려움 없이 멀리 내다보고 국민을 믿고 전진해야 한다."
- 연금개혁 같은 사안도 너무 오래 미룬 숙제이긴 하지만 합의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 내고 덜 받게 개혁'하자고 하면 엄청난 저항이 생길 것 같지만, 국민들도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학자들이 말하는 북유럽처럼 많이 받는 국민연금은 애초부터 우리나라에서 불가능하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꾸 시간만 끌다가는 상황이 악화될 뿐이다. 여기에 실망하고 반발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 한다."
- 한국 사회가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만 커지고 진보가 득세한다는 말도 들린다. "한국은 지금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굴리면서 사는 상태로 빠진 듯하다. 사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다. 이른바 '다이내믹 코리아'가 아닌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상위 20%를 뺀 나머지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벌어진 격차에 지레 포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 시장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소수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시민들도 즐겁게, 열심히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한국을 다시 뛰게 해야 한다. 아니 걷게라도 만들어야 한다."
- 우리 사회가 무기력증에서 탈출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시 강조하지만 사회를 떠받치는 하위 80%가 다시 뛰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구조개혁도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필요한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의 부정직함, 그들의 무지와 위선이 엄청난 문제를 낳고 있다. 자신들이 나라의 주인이고, 상위 중산층(upper middle class)이고, 문화·정치권력을 누리고 있으면서 걸핏하면 남 탓만 한다. 때때로 반일을 선동하고, 재벌·보수정당 등 친일파의 후예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고 선동한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후예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 거듭되는 공격으로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후예로 몰린 보수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선동이 지금까지는 잘 먹혔다. 하지만 이제 그 선동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그들이 대중에게 요구하는 피해의식과 부채의식, 남 탓과 음모론이 예전만큼 잘 먹히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그들의 서사가 낡은 구조와 허구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은 오로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마 보수가 궁지에 몰리는 것은 이른바 좌파의 선동 때문이라기보다는 보수 자신의 무능 때문이 아닐까 싶다."
-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와 같은 호소력 있는 구호가 있을까. "GDP(국내총생산)에서 멕시코가 우리나라를 추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멕시코든 브라질이든 인도든 그런 나라들과 우리나라가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는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한국을 한국답게 했던가. 그것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 나라'라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난 놈이든 못난 놈이든,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매우 독특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그런 특성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하지만 무한정 계속 뛸 수는 없으니까 '다시 모두가 함께 걷는 나라'쯤 될는지 모르겠다."
- 기후위기, 국제 정세의 급변, 경제적 위기 등 여러 가지 위기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진영 대결이 극단에 이르고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는 느낌이다. "그렇다. 그래서 진영에서 이탈한 자유로운 영혼들이 움직일 때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