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과 정부는 31일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잠정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당정은 지난 29일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 만큼 올 2분기(4~6월) 전기·가스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하지만 요금을 올릴 경우 물가 상승을 자극하고, 당정의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 여론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이날 당정협의회 후 브리핑에서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 추이와 인상 변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전문가 좌담회 등 여론 수렴을 좀 더 해서 추후 (인상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 의장은 “인상 시기와 폭에 대해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제시한 복수의 안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에 대해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며 “요금 인상 시 국민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전과 가스공사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했다. 산업부는 전기 요금의 경우 적자 해소를 위해 지난 1분기 kWh(킬로와트시)당 약 13원을 올린 데 이어, 이번에도 7원 안팎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가스 요금 인상 불발은 경제 정책과 관련, 정부와 여당이 처한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때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에도 인위적으로 전기·가스 요금을 억제하면서 한전과 가스공사의 손실 규모를 천문학적으로 키웠다”며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정상화하려면 요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지만, 그에 따른 부정적인 여론을 모두 윤석열 정부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날 한국갤럽이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로 4개월 만의 최저치였다. 국민의힘 지지율도 33%로 더불어민주당과 같았다. 여권에서는 “강제징용 해법, 근로시간 개편안 관련 논란으로 국정 지지율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섣불리 전기·가스 요금을 올릴 경우 민심 이반이 가속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국민의힘이 이날 당정 협의에서 한전과 가스공사의 자구책을 주문한 것도, ‘대국민 설득'을 위한 선제적인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석유·가스·석탄 국제 가격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공기업 부실의 해법을 요금 인상 외의 방법에서 찾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32조6000억원 영업손실을 낸 한전은 올해 추가 인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올해도 12조6320억원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가스 요금은 올 1분기 전기 요금을 인상하는 과정에서 가계 부담을 이유로 동결한 데 이어 또다시 인상이 보류되면서 미수금 규모가 3월 말 12조원에서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산업부는 이날 전기·가스 요금 인상안 발표를 준비하며 전날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전기·가스 요금을 올리면 전반적인 물가를 자극해 서민 경제 어려움을 가중할 수 있다는 여당과 기획재정부의 반대 기류가 전달되면서 요금 인상에 필요한 한전 이사회와 전기위원회 개최 일정도 전날 밤 모두 취소됐다. 최근 유가와 가스 가격이 안정되는 추세를 보이자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기재부의 주장이 영향을 준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이날 당정협의회 직후 “인상 여부를 언제까지 결정할지에 대해서는 지금 단계에서 바로 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했다. 인상 결정 시점을 정하지 않고 무기한 연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도 “4월이 끝나기 전엔 결정을 해야 한다. 무작정 연기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지금은 요금을 적절히 올리면서 에너지 절약을 유도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전력 성수기를 앞둔 2분기가 요금 인상의 골든타임이었는데 이를 놓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