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재정비 마스터플랜’ 수립에 착수하면서 “주택정책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기 신도시 재건축 및 리모델링’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대선 공약이다. 하지만 지난 8월 16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기 신도시 재정비 계획을 오는 2024년까지 마련하겠다”고 밝히면서 “대선 공약을 사실상 파기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2024년에나 1기 신도시 재정비 계획을 수립하면 윤석열 정부 임기 내 재정비 완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에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국민들이 이해해 주실 것”이란 언급을 하면서 1기 신도시 주민들을 중심으로 민심이 격앙된 바 있다.
이 같은 민심에 편승해 김동연 경기지사까지 “노후화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도시의 자족기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경기도 분당, 산본, 일산, 중동, 평촌에 살고 계시는 1기 신도시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라며 “대선 공약을 이렇게 쉽게 폐기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기름을 부었다. 이에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공약 파기는 무책임한 선동”이라며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면서 공방전이 계속됐다. 여기에 분당(1기 신도시)과 판교(2기 신도시)를 지역구로 하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경기 성남 분당갑)까지 ‘1·2기 노후신도시 재생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히면서 여야의 잠룡(潛龍)들이 모두 1기 신도시 논란에 가세한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정작 도시 재정비는 ‘1기 신도시’보다 1기 신도시 옆 구시가가 더욱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1기 신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큰 분당신도시 옆의 성남 구시가는 ‘천당 아래 분당’이란 소리를 듣는 분당에 비해 각종 주거지표가 훨씬 열악하다. 한데 분당을 중심으로 한 ‘1기 신도시’ 재정비 요구만 터져나오면서 정작 구시가 재정비가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천당 아래 분당’이라지만…
산자락에 자리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집중호우 등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한 곳도 성남 수정구와 중원구 등 구시가 일대다. 지난 8월 8일 서울 등 수도권에 쏟아진 115년 만의 폭우에 침수피해가 집중된 곳도 이 일대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성남에는 당시 472㎜의 폭우가 쏟아졌는데, 남한산성 아래의 중원구 은행동에서는 곳곳에서 옹벽과 축대가 무너지고, 반(半)지하를 낀 다세대·다가구주택들이 침수되는 재산피해가 속출했다.
지난 8월 31일 찾아간 중원구 은행동의 연립주택 앞 바로 위로는 무너진 옹벽과 콘크리트 더미가 그대로 노출돼 있는 공영주차장이 있었다. 인근에서 만난 주민은 “폭우 때 공영주차장 콘크리트 블럭들이 쏟아져 차량들이 파손됐고, 인근 주택들을 덮쳤다”고 했다. 인근에 있는 은행식물원 옹벽도 붕괴되기 직전처럼 보였다. 옹벽에 금이 가면서 성남시에서 긴급 보강공사에 착수했지만 빨라도 오는 12월에나 공사가 끝날 예정이다. 인근에서 만난 한 주민은 “처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옹벽이 더 튀어나왔다”며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옹벽이 터져 집을 덮치지 않을지 너무 걱정된다”고 했다.
실제로 성남시에 따르면 지난 8월 31일까지 접수된 침수피해 가구는 총 729가구인데, 1기 신도시인 분당구보다 수정구와 중원구 등 구시가에 피해가 집중됐다. 성남시의 한 관계자는 “침수피해를 당한 주택 729가구 중 구별로는 수정구가 283가구, 중원구가 284가구, 분당구가 162가구”라며 “구시가(수정구, 중원구) 쪽이 시설이 오래되다 보니 피해가 집중된 것 같다”고 말했다.
폭우 피해 성남 구시가지에 집중
이재명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재선 시장을 지낸 성남시의 모태는 박정희 정부 때 서울 시내 무허가 판자촌 철거민을 집단이주시켜 정착촌으로 조성한 ‘광주대단지’다. 당시 열악한 주거환경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관공서를 습격하는 폭동이 터지기도 했는데, 지금도 분당에 비해 집값이 저렴해 저소득 주민들이 산자락의 다세대·다가구주택을 중심으로 많이 거주한다. 이로 인한 주차문제, 쓰레기문제 등도 심각한 편이다.
실제로 성남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는 1기 신도시인 분당, 2기 신도시인 판교가 자리한 분당구에 비해 각종 주거지표 면에서 열악하기 그지없다. 분당구의 전체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하는 반면, 중원구의 아파트 비중은 32%, 수정구는 29%에 그친다. 특히 수정구는 2기 신도시인 위례신도시 일부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아파트 비중이 채 30%가 안 된다. 개발연대 때 소위 ‘집장사’들이 산자락 경사를 이용해 반지하를 끼고 날림으로 지은 다세대·다가구주택들이 많은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 경기연구원에 따르면, 성남의 반지하주택은 모두 1만2165가구인데, 경기도 31개 시군 가운데 부천(1만5450가구)과 수원(1만4452가구)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아파트 비중이 낮고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많다 보니 수정구와 중원구의 주차장 확보율 역시 분당구에 비해 현저히 낮다. 분당구의 주차장 확보율은 160% 달하는데, 수정구와 중원구의 주차장 확보율은 각각 95%와 100%에 그친다. 이마저도 대로변과 이면도로 등 노상에 거주자 우선주차구역 등을 남발해 확보율을 높인 것이 이 정도다. 실제로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 이면도로 변은 주차된 차들로 뒤덮여 있어 보행환경이 극히 열악하다.
주거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1기 신도시인 분당에 비해 중국 국적 조선족 동포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 성남시의 등록 외국인은 2만5106명인데, 이 중 수정구에 거주하는 등록 외국인은 절반이 넘는 1만5015명에 달한다. 중원구(3998명)까지 합친 성남 구시가(수정구, 중원구)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만9000여명으로 분당구 거주 등록외국인(6093명)의 3배가 넘는다.
노태우 정부 때 주택 200만호 공급계획에 따라 조성된 1기 신도시와 그 이전에 무계획적으로 조성된 구시가의 차이는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도 안양시 역시 신도시와 구시가가 행정구로 나뉘는데, 1기 신도시인 평촌신도시가 자리한 안양시 동안구의 아파트 비중이 83%에 달하는 반면, 경부선 철길을 따라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밀집한 만안구의 아파트 비중은 59%에 그친다. 일산신도시의 경우, 구시가라고 할 수 있는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삼송, 원흥, 향동 등 신규 택지지구가 그나마 많이 조성되면서 아파트 비중에서 큰 차이가 없어졌다.
부동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1990년대 중반에 대거 입주한 1기 신도시는 이제 겨우 경기도 재건축 연한인 30년을 채운 수준”이라며 “서울만 해도 1기 신도시보다 앞서 준공된 노후주택들이 수두룩한데 대선 공약이라고 1기 신도시부터 재정비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