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 쓴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화제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취임사에서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이후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정치권에서 ‘유행어’가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집 근처에 시위대가 몰려오자 지난 5월 15일 페이스북에 “성당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지성이 작은 시골 마을 일요일의 평화와 자유를 깨고 있다. 평산마을 주민 여러분 미안합니다”라며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야당도 반지성주의라는 용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은 당 비대위 회의에서 “민주주의 위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 규정하고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대통령이) 숨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 11일 조오섭 민주당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한 반지성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여당도 같은 용어로 맞대응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인천 계양을 선거에 출마한 이재명 후보를 향해 “이 전 지사는 반지성주의에 편승하여, 국민을 속일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버려야 한다”며 “다가올 법의 심판은 반지성주의로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게 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쓰인 말이고 그 기원은 뭘까. 우선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대통령 본인이 전체를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다. 취임사준비위원회는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교수와 이재호 전 한국출판문화진흥원장이 이끌었다. 취임사 준비 과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각범 전 수석이 이끄는 위원회에서 초안을 만들어서 이 중 한두 개를 최종 보고했는데 대통령이 절반으로 분량도 줄이고 내용을 완전히 바꿨다”며 “취임사는 전체가 윤석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각범 명예교수가 초안을 냈지만 윤 대통령 본인이 새로 쓴 수준으로 완전히 뜯어고쳤다는 것이 이 인사의 설명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여러 면에서 이전 대통령들의 취임사와는 달랐다는 것이 각 분야 교수들의 평이다. 이전 대통령들의 취임사는 대부분이 사회 현안에 대한 분석과 거기에 대한 큰 밑그림을 제시하는 형식이 많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 같은 취임사와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첫째로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딱 하나,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통합할지, 경제를 어떻게 살릴지 이런 얘기는 없이 오직 자유주의만을 얘기했다. 반지성주의 역시 자유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용어였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를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정확할까. 이상돈 전 민생당 의원(중앙대 법대 명예교수)은 “앞뒤 내용으로 미뤄보면 윤 대통령이 말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반지성주의는 ‘전문가·지식인을 배격하고 다수의 힘을 앞세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반지성주의라는 용어가 실제 탄생하고 사용된 배경을 보면 그렇게 사용될 용어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호프스태터 말한 ‘반지성’은 닉슨과 매카시
반지성주의가 미국 정치·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에 의해 탄생한 개념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62년 저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의해 제시됐으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60년 전 개념이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휩쓸고 있었다. 매카시즘은 1950년대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조지프 매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성향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연속해 몰아붙인 사태에서 비롯된 용어다.
미국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이상돈 전 의원에 따르면, 호프스태터가 말하는 반지성주의는 ‘엘리트 지식인’들을 공격하는 매카시, 그리고 훗날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되는 리처드 닉슨 등의 인물을 정확히 겨냥한다. 다시 말해 엘리트 지식인들을 ‘빨갱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비난한 매카시와 닉슨 등의 태도가 바로 ‘반지성(Anti-Intellectual)’으로 공격받았다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엘리트 지식인’ 중 대표적 인물이 미 국무부 차관을 지낸 앨저 히스다. 미국의 대표 명문대인 하버드대를 나온 히스는 하원 청문회에서 닉슨이 자신을 ‘빨갱이’로 몰아붙이자 “당신은 듀크대 로스쿨 나오지 않았냐. 나는 하버드대 나왔다”고 맞서면서 최악의 대결로 치달았다. 이 전 의원은 “당시 닉슨은 앨저 히스 등을 몰아치다가 ‘빨갱이잡이’나 하는 인물 정도로 몰렸고, 닉슨은 하원의원 때 정치생명을 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직과 사실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미국 정치 풍토에서 히스가 소련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닉슨은 정치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매카시즘이 빚은 정치적 갈등은 이후 아이러니하게 흘러갔다. 재판에도 불구하고 히스가 소련 간첩이라는 사실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나 미 연방수사국(FBI)이 히스가 간첩이 맞다는 사실을 공개해야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데, NSA나 FBI는 자신들의 공작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증거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히스는 법정에서 위증을 한 죄로만 징역을 살았고, 1996년 숨질 때까지 자신이 소련 첩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반면 닉슨은 이후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 대통령까지 승승장구하지만 이후 뉴욕타임스가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잃게 된다. 이상돈 전 의원은 “닉슨은 말하자면 아이비리그 ‘먹물’들에게는 아치 에너미(Arch Enemy·최대의 적)였다”며 “반지성주의가 정확히 가리키는 것은 바로 닉슨과 매카시”라고 말했다. 호프스태터의 시각은 전형적인 아이비리그 리버럴들의 시각이었다는 설명이다. 이 전 의원은 “호프스태터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훗날 교수가 되는 박사들을 많이 키운 것으로 안다”며 “정치학계에서는 갓파더(godfather·대부)처럼 받아들여지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베노나 프로젝트 공개로 사태 급반전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반지성주의’를 둘러싼 사태는 급반전된다. 소련이 붕괴된 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에 넘긴 기밀문서와 NSA가 냉전시대에 도·감청한 기밀문서들이 해제되면서 미국의 공작인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가 공개된 것이 계기였다. 여기에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었다. 앨저 히스는 물론 해리 덱스터 화이트 전 재무부 차관보 등 1960년대 닉슨과 매카시가 지칭한 ‘소련 첩자’들이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한 해리 홉킨스 전 대통령 특보까지 포함돼 충격을 줬다. 이후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뇌물 등을 받으면서 포섭된 것이 아니라 신념에 따른 자생적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상돈 전 의원은 “베노나 프로젝트는 내 관점에선 미국 지성사의 분기점”이라며 “2000년에 책이 나오자 미국의 진보 지식인들에게 굉장한 타격을 줬다”고 말했다. 당초 호프스태터가 지칭한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사실 자체가 잘못돼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호프스태터는 닉슨과 매카시를 ‘반지성’이라고 비판했는데, 닉슨과 매카시가 ‘소련 첩자’ ‘위선자’ ‘매국노’ 등으로 비난한 이들이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들을 두고 지칭한 ‘반지성’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볼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 전 의원은 “베노나 프로젝트가 공개되면서 호프스태터를 포함한 진보 학자들의 주장은 허무하게 되어버렸다”며 “닉슨이 앨저 히스를 간첩으로 몰면서 평생 ‘빨갱이잡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었는데, 실제로는 닉슨이 옳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진보 학자들의 주장에 타격을 준 베노나 프로젝트 공개는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에도 결정적 영향을 줬다.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 개념”
호프스태터가 ‘반지성주의’를 외친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맥락이었다. 이 전 의원은 “윤 대통령에게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누가 알려줬는지도 궁금하지만, 수십 년 전 개념인 데다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 이런 개념을 굳이 취임사에 넣은 것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깊이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역시 미국에서는 수십 년 전 각광받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등을 맞으며 이론적 한계가 명확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 그의 이론이 한국의 현실에 적합한지 의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 전 의원은 “반지성주의도 그렇고 프리드먼이 지금 각광받는 현실은 오히려 한국의 지적 깊이가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쓴 것은 호프스태터가 공격한 과거 미국의 정치 현실과는 다른 현상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라는 취임사 내용을 볼 때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의 확대로 인해 마치 조회수가 높은 뉴스나 콘텐츠가 진실이 되어버리는 듯한 현실을 윤 대통령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사회문제이긴 하다. 미국에서도 과거에는 성향이 다른 언론사들의 관점 차이 정도였던 문제가 지금은 정반대 정치 성향의 폭스뉴스와 NSNBC가 아예 서로 다른 사실과 주제를 앞세워 현실을 논할 정도로 갈등이 심해졌다. 어쨌든 이상돈 전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들이 걸러지지 않은 자신만의 검증이나 주관적 잣대로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지금의 사회 병리현상은 호프스태터가 말한 ‘반지성’의 원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만약 이런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면 ‘반지성주의’ 외에 다른 용어를 쓰는 게 더 나을 뻔했다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이 어떤 의미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썼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앞뒤 내용을 통해 더 자세히 유추해볼 수는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의 대안으로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과학과 진실(Science & Truth)은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라며 “이 캐치프레이즈가 우리나라에선 주목받지 못했는데, 윤 대통령은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성장과 도약, 그 과정에서의 국제연대를 취임사에서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성장·도약·연대를 통한 자유주의가 윤석열 대통령의 구상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