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5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시 과오(過誤)로 수감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6년 12월 9일 박근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고 4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2명이 동시 구속 상태에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간절한 사죄의 말씀을 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전신(前身) 자유한국당 시절을 포함해 국민의힘 대표가 전직 대통령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적폐'의 낙인에 발목 잡혀 대선·지방선거·총선에서 연패했던 야당이 이번 사과를 계기로 중도 확장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야권 일각에선 반발도 나왔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의 잘못은 곧 집권당의 잘못이기도 한데 저희 당은 당시 그런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통치 권력의 문제를 미리 발견하고 제어하지 못한 무거운 잘못이 있다”고 했다. 이어 “자리에 연연하며 야합했고 역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지혜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위기 앞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에는 정경유착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며 자신의 소신인 경제 민주화를 간접적으로 강조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선 “공적인 책임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국정에 개입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면서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했다.
구(舊) 여권의 과거사를 사과한 이후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를 겨냥했다. 김 위원장은 “민주와 법치가 오히려 퇴행한 작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깊이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선거 연패를 직접 언급하며 “국민들이 저희 당에 준엄한 심판의 회초리를 들어주셨다”며 “국민 뜻을 겸허히 받들며 언제나 반성하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했다. 향후 당의 방향에 대해선 “정당을 뿌리부터 다시 만드는 개조와 인적 쇄신을 통해 거듭나겠다”며 “민생과 경제에 대해서도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사과·사죄·반성이란 단어를 9차례 언급했다.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었다. 용서를 구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는 목소리가 떨렸다.
김종인, 탄핵의 강 건너 중도 확장 승부수
15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대국민 사과는 ‘야당판 과거사(史) 청산’으로 풀이된다. 광주(光州)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 사과’를 한 데 이어 두 전직 대통령 과오(過誤)를 반성하면서 과거와의 결별에 나섰다는 평가다.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 지은 김종인 체제는 본격적으로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후년 대선 준비에 착수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대국민 사과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국민의힘 내부에선 “보수 정당이 탄핵의 강을 건너서 중도층에 상륙하기 위해서, 대국민 사과는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김 위원장의 사과문 제목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였다. A4용지 한 장 분량 사과문에서 사죄, 반성, 잘못, 용서, 성찰, 허물과 같은 단어를 15차례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굳은 표정으로 준비한 사과문을 5분 24초간 낭독했다. “저희가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목소리가 떨렸다.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해선 “공구수성(恐懼修省) 자세로 자숙하지 못했다”고 했다. 민심을 두려워하며 반성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두 전직 대통령 잘못으로 정경 유착, 국정 농단을 거론했다. 김 위원장은 “특정한 기업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경영 승계 과정의 편의를 봐준 것들이 있다”며 “또한 공적인 책임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국정을 농단한 죄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당을 뿌리부터 다시 만드는 인적 쇄신을 통해 거듭날 것”이라면서 “우리 정치의 근본적 혁신의 방향을 모색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한 중도층의 비호감도를 끌어내리지 못하면 다가오는 선거에서 필패(必敗)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9월 실시한 여론조사(신뢰 수준 95%, 표본 오차 ±3.1%포인트)에서 국민의힘 비호감도는 60%였다. 더불어민주당(49%)보다 11%포인트 높았다. 김 위원장은 이날 비공개회의에서 “젊은 세대, 중도층 지지를 회복하려면 반드시 대국민 사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이날 사과는 취임 6개월 만에 이뤄졌다. 김 위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12월 9일을 ‘디데이’로 잡았지만, 연말 국회 대치 상황을 감안해 늦췄다. 이 과정에서 당내 일각에서 반발이 일자 김 위원장은 “대국민 사과조차 못한다면 직(職)을 내놓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김 위원장이 사과 시점을 늦추면서 한발 물러서자, 처음엔 사과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장을 지키면서 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국민의힘 최다선인 정진석 의원은 “진솔한 반성으로 국민들에게 거듭나겠다는 다짐을 드린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김 위원장 사과를 “의미 있는 일”이라며 긍정 평가했다. 이낙연 대표는 “김 위원장의 사과는 잘하신 일로, 당 전체를 그런 방향에서 잘 이끌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반면 친문(親文) 성향의 같은 당 정청래 의원은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뜨내기 비상대책위원장이 할 사과는 아니다”라고 했다.
친이(親李)·친박(親朴) 세력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우리공화당 조원진 대표는 “국민의힘은 더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했고,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도 “개인적 정치 욕망을 위장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무소속 홍준표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런 배알도 없는 야당은 처음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