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일대의 모습. 삼성전자가 360조원을 들여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는 곳이다. 지난달부터 토지 보상 절차를 밟고 있다. 올해 착공할 예정이다. /박성원 기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은 다 끝난 이슈인 줄 알았다. 정치권 일각에선 “호남 이전이 윤석열 내란 종식”이라고 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정부가 기업을 옮기라 마라 할 수는 없다”며 정리한 듯 보였다. 대신 현대차그룹이 전북 새만금에 9조원을 투자하기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정치권과 재계에서는 광주·전남 이전이 강하게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4일 ‘용인 반도체 국가 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행동’이라는 단체가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단체는 경기 지역 유권자 46.5%가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를 전력이 풍부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설문 문항을 찾아봤다. 앞선 질문이 있었다. “용인반도체 산업단지 전력 공급용 송전탑 설치를 둘러싸고 강원, 호남, 충남, 경기도 안성 등 다양한 곳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알고 있느냐?” 그다음이 이전 관련 질문이었다. ‘송전탑 설치 갈등은 반도체 산단의 대규모 전력 공급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용인 반도체 산단을 ①계획대로 추진해야 하냐 ②전력이 풍부한 곳으로 이전해야 하냐’는 내용이었다. 설문의 객관성·중립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은 ‘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 여론을 쌓아가고 있다.

시민단체만이 아니다. 최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역별 전기 요금 차등제를 산업용 전기부터 조속히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기를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지산지소’ 원칙을 요금 체계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정책의 목적이 기업의 지방 이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17일 SNS(소셜미디어)에 “반도체는 방대한 전력과 물, 그리고 정밀 화학 소재가 쉴 새 없이 맞물려야 가동하는 장치 산업”이라며 최상의 효율을 제공해온 수도권 클러스터 초집중에 대해 전략적 재해석을 해야 한다고 썼다. 에너지와 물류에 강점을 가진 거점들로 멀티 허브를 구축하는 결단을 강조하며, “수도권의 관성을 넘어 산업 지도를 넓게 조망하는 안목, 그것이 포스트 호르무즈 시대 대한민국 반도체가 세계 시장에서 신뢰를 선점할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반도체 기업에 이전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용인 반도체 산단 안팎에서는 부지 수용 절차가 최근 주춤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6월 지방선거가 끝나면 이전 압박이 한층 거세질 것으로 예상했다. 수도권 민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 이후 정책 드라이브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러나 반도체 공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지역 균형 발전과 멀티 허브 구축을 위해 ‘호남 팹(반도체 공장)’ ‘영남 팹’ 이렇게 만들 순 없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핵심은 인재인데, 산업계에선 “용인·평택이 인재 확보의 남방 한계선”이라 한다. 반도체 산업은 또 수십 년간 축적된 협력업체, 장비·소재 공급망 등이 얽혀 형성된 ‘집적 생태계’ 위에서 작동한다. ASML, AMAT, 램리서치 등 세계적 반도체 장비 회사의 한국 법인도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반도체는 지금 한국 경제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간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다. 실제로 불과 3년 전만 해도 SK하이닉스는 반도체 불황으로 영업적자가 8조원에 달했다. SK하이닉스 때문에 SK그룹까지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지금의 성과를 전제로 산업 구조를 흔드는 것은 위험하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목표가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국가 경제를 먹여 살리는 거위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