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 찬 이진숙의 모습은 권력 따라 칼춤 추는 무도(無道)한 공권력을 폭로하는 상징적 이미지가 있었다. 그도 수갑 찬 모습을 내보이며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어필하려 했다. 민주당이 그가 방송통신위원장에 취임한 당일 탄핵안을 발의하고 직무를 정지시킨 것은 다수당의 막무가내 횡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탄핵 기각으로 위원장에 복귀한 그는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지만 사퇴하지 않았다. 새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국무회의에서 발언하려다 이 대통령에게 “그만 하세요”라는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다. 대통령은 그가 ‘개인 정치’를 한다고 직격했다. 국무회의에서도 배제했다. 그는 ‘자기 정치’가 아니라고 대통령에게 맞섰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대구시장에 출마할 생각이 있다면 나가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정부가 방통위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로 개편하며 끝내 그를 내쫓자 헌법소원까지 제기하며 저항했다. 그랬던 그가 헌법소원 결과가 나오기도 전, 지난달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상대의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대통령과 민주당, 공권력 집행에 저항했던 모든 명분과 가치를 패대기치고, 대구시장 출마를 위해 ‘자기 정치’를 했다고 자백한 셈이다.
이진숙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 엘리트 집단의 도덕적 붕괴를 상징하는 한 사례라고 본다. 엘리트란 단순히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전문성과 엄격한 직업 윤리를 요구받는다. 그들이 공직(公職)과 직업적 성취를 공적 헌신이 아니라 사익(私益) 추구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활용한다면 사회의 신뢰 자산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전문성만 있고 공적 윤리가 없는 엘리트는 ‘유능한 약탈자’에 불과하다.
물론 공적 헌신과 개인의 입신(立身)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전문가 집단, 엘리트 조직에는 오랜 세월 의로운 선배들이 싸우고 희생하며 쌓아올린 가치와 성취가 있기 마련이다. 직업 윤리상 차마 넘지 못할 선을 넘으며 그런 희생을 짓밟고 성취를 허무는 자들이 있다.
검찰은 예전에도 ‘권력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지 않은 건 아니지만, 천문학적인 비리 사건의 항소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권력 앞에 조아려도 검찰 존재의 본질을 배반할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대장동 일당 항소 포기 때는 청와대와 법무부 압력이 있었니 마니 논란이라도 있었다. 위례신도시, 서해 공무원, 송영길 전 대표 사건 항소·상고 포기 때는 그런 논란조차 없었다. 지휘 라인 간부들이 알아서 기고 엎드렸다는 것이다. 직업 윤리의 최저선(最低線)을 무너뜨린 조직에선 굴신(屈身)에 능한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법이다.
군은 어떤 집단보다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 할 곳이다. 미국에선 장군까지 진급했다면 퇴직 후 정치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현재 상원 의원 100명 중 장성 출신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원 의원 435명 중에서도 연방 정규군 장성 출신은 2명뿐이다. 우리 군에선 정당인으로, 국회의원으로 신분을 바꾸려는 장성 출신이 줄을 섰다. 현역 의원만 5명이다. 국방장관을 지낸 사람이 방산업체의 로비스트로 볼 수밖에 없는 상근고문으로 갔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비상계엄 때 드러난 우리 군의 참담한 모습은 오래전부터 누적된 군 엘리트들의 타락과 저질화로 예고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그 책임을 정치와 정치인에게 쉽게 돌린다. 그러나 각 분야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엘리트 집단이 직업적 규범을 허물지 않는다면 폭주하는 정치의 방파제가 될 수 있다. 저질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관료·법원과 검찰·군·언론 등 엘리트 집단의 타락과 저질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