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4일 서울 중구 주한러시아대사관 외벽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김지호 기자

2020년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가 서해에서 북한군이 쏜 총에 절명하고 소각 만행까지 당했을 때,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책무를 저버린 처사였다. 정부의 대북 정책 멘토라는 이들은 모여서 이런 말도 했다. “이씨와 가족에게는 굉장히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이번 일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국민이 살해당했는데 분노하기는커녕 이를 가해자와 대화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북한 당국 눈에 이런 한국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불문가지다. 자국민이 죽어도 응징을 포기하는 나라는 하찮고 만만한 상대일 뿐이다.

얼마 전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러·우 전쟁 발발 4주년을 맞아 서울 한복판에서 벌인 행태를 보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북한에 무시당하니 러시아도 우리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러시아는 대사관 건물에 ‘승리는 우리 것’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격전지인 쿠르스크 점령에 기여한 “북한군의 위대함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위대한 북한군’ 운운은 북한 인민군의 모태가 무엇이며 그들이 한국 땅에서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언사였다. 인민군은 중국 국공 내전 당시 중공군 편에 섰던 조선의용군에서 비롯됐다. 그때 쌓은 실전 경험으로 6·25 때 동족의 가슴에 총질을 했다. 이번에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도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고 유사시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북한군을 찬양했다. 이런다고 너희가 어쩔 거냐는 식이다. 이런 무시를 당하고도 우리 정부는 유야무야 넘어갔다. 한국의 대응을 전 세계가 지켜봤다.

대한민국은 이런 능멸을 감내해야 할 약소국이 아니다. 군사력은 세계 5위이고 어엿한 무기 수출국이다. 핵은 없지만 재래식 전력은 북한을 압도한다. 지하 벙커에 숨은 김정은을 공포에 떨게 한다는 현무 미사일도 보유하고 있다. 이런 힘을 갖고도 비굴하게 구는 태도가 우리를 얕잡아보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지켜주려고 기꺼이 자기 피를 흘리는 국가 간 관계가 혈맹이다. 러·우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가 그런 사이가 됐다. 러시아는 북한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고 상호 군사 개입의 길을 열었다. 그런데 이런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한·미·일 연합 훈련을 우리는 미국에 “일본 빼고 하자”며 무산시켰고, 최후의 생명줄인 한·미 연합 훈련조차 2023년 대비 30%나 줄였다고 한다. 지난해 북한 김여정이 “대규모 합동 군사연습을 연속 감행하는 한국과 마주 앉을 일 없다”고 하자 예정된 훈련도 미뤘다.

북한이 우리와 마주 앉지 않겠다는 말의 진실은 잘사는 남한의 영향력이 북한에 미치는 게 두려워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군사 훈련을 구실 삼자 그들 하자는 대로 하는 한국은 다루기 쉬운 만만한 존재일 뿐이다. 북한은 지금껏 만만하고 나약하게 구는 남한에 대화를 구걸한 적이 없다. 북한을 압도하는 경제력과 문화, 무력을 지니고도 툭 하면 그들에게 “괴멸적 타격을 가할 것”이란 협박을 듣는 것도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나라가 이러니 장병들이라고 땀 흘려 훈련하고 국방의 결의를 다질 리 없다. 요즘 병장 월급이 200만원이라 한다. 1만원 남짓 받았던 필자 세대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채무 조정을 받는 이가 지난 5년 사이 80%나 늘었다고 한다. 내무반에서 휴대전화로 사이버 도박에 접속해 게임 머니에 탕진하다가 빚까지 진다는 것이다. 이런 군을 둔 나라가 위력적인 무기를 지녔다고 한들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나라가 존중받는 것도 무시당하는 것도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다. 무시를 당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